한줄 詩

홀로서기 - 서정윤

마루안 2018. 1. 8. 23:09



홀로서기 - 서정윤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떨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하며 여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시집, 홀로서기, 청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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