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가 붉어지는 이유 - 이강산
그러니까 내가 이 골목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늦바람이 든 거다
곰곰 짚어보자면 바람은 생의 발단쯤에서 복선처럼 스쳐갔던 것,
절정의 뒤꼍에서 가으내 골목 힐끔대는 이 노릇이란
내게 휘어질 생의 굽이가 한마디쯤 더 남아 있는 탓이려니.
때도 없이 붉어지다 뼈가 부러진 옆집 대추나무 훔쳐보듯 은근슬쩍 바라보면
봉충다리 막냇누이의 봉숭아물 같은, 눈물 같은
선홍(鮮紅).
누군가의 연모 지우려 제 스스로 허벅지 찌르지 않고서야 저토록 노랗게 붉어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늦바람이 든 거다
저도 나처럼 울긋불긋 바람의 단풍이 든 거다
*이강산 시집, 모항, 실천문학사
구절사 - 이강산
허물어진 산신각 터 벼랑 끝은 가을이다
벼랑 아래 가을은 어쩌다, 저토록 깊어서
손금 가늘고 빛이 옅다
이 가을에 닿기 전 쉰 번쯤 고비를 넘겼을 듯하다
도토리 한 분 집 떠나는 소리가 우레다
빈 손, 먼 길 아니더냐
물어올 듯 꽉 다문 입술이 붉다
홀로 걸어와 모르겠노라, 고요히 나도 붉은 침묵이다
품고 온 사람 모두 부려놓았는지
저 가벼운, 투명한 나비 한 마리, 채송화 못 본 척
돌숲으로 총총총 걸어가는
도토리도 나도 신발 끈을 고쳐 묶는 구절사
벼랑 끝에 홀로 선 가을도 어언 벼랑 끝이다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 등이 있다. 소설가,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팔방미인이다. 현재 대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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