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네킹, 그 겨울 오후 1 - 김이하

마루안 2018. 1. 8. 22:45

 

 

마네킹, 그 겨울 오후 1 - 김이하

 

 

한 천년쯤은 흘렀겠지요

그래도 그날 오후는 따뜻했습니다

아마, 당신의 눈빛이 내 가슴에 꽂히는

이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았을 나의 계절은

몇 번인가 옷을 벗고 알몸으로 휘청거렸을 테지만

여기서 더 가깝진 못했지요

그래요, 그건 당신이 알지요

한 천년쯤은 훌쩍 흘러갔겠지요

빈방으로 돌아가고 빈방에서 나오던

당신이 내게서 멀어진 시간들

그 밤, 훅! 하고 방안에서 끼치던 살 냄새

그건 당신이 벗어 던지던 몸의 세월이겠지요

누가 알겠어요, 발부리에 걸린 빈 술병들

혼자 울다가 뒹구는 어둠을

날카롭게 누군가 가슴을 찌르고 도망치던 뒷모습을

누가 알겠어요, 천년의 세월도 덧없었음을

그 겨울 오후 절벽의 어둠을 떨구고

이제 막 거리를 덮는 물결

누군가 돌아오고 있군요

그러나 나의 신열은 영 끝나지 않는군요

 

 

*시집, 타박타박. 새미

 

 

 

 

 

 

마네킹, 그 겨울의 오후 2 - 김이하

 

 

길을 가다가 값싼 사랑을 생각했지

마네킹을 벗기고 싶다는 은근한 욕정이

내내 뒤돌아보게 했지

근사한 몸이야, 자본주의 같은 유혹이 낄낄거리며

나를 세웠지, 보고 싶었어, 아아

588 모퉁이를 돌면 유리창을 때리는 동전

버르적거리다 꺾여 버린 수상한 꽃들 속으로

나른하게 걸어갔었지, 끝이 없었어

천진스럽게 걸어가던 아이는 저만치 멀어지고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지

몸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아니 내 몸 위로

마네킹의 팔다리가 우르르 떨어지는,

바겐세일 같은 사랑을 생각했지

50%를 꿈꾸고 들어서면 언제나 동나 버린

그 백화점 한 모퉁이를 돌았지

낡은 지갑의 존재를 확인하는 손끝이

불에 댄 것처럼 멍하니 떨려 오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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