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은 혀가 없다 - 박지웅

마루안 2018. 1. 22. 19:22



슬픔은 혀가 없다 - 박지웅



슬픔이 왜 말이 없나 보니 혀가 없다
그는 지금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예민한 기록 혹은 지극히 외로운 해명
그는 누구인가 아니 그는 누구였을까


본디 그는 없는 듯이 살아왔다
기쁨과 배다른 형제로 태어나 멸시받으며 살았다
평소 온순한 뱀으로 조용히 기어 다니지만
내 마음이 떠나가, 따위 말에 한순간 아가리 벌려 꽃을 삼켜버리기도 했다
말했듯, 슬픔은 혀가 없다
실은 두 갈래로 갈라진 찢긴 마음뿐이다
손수건 같은 곳에 조용히 숨어 지낼 뿐이다
득달같이 달려와 우리의 환심을 사려는 가벼운 기쁨에 비할 수 있을까, 또
큰 기쁨은 구덩이를 깊이 파는 법


본디 그는 손만 잡아주어도 마음을 빼앗기는 정결하고 유순한 처자였다
기쁨이 손 내밀자 순진하게 따라나섰다가 몸을 빼앗겼다
그는 납덩이같은 몸을 일으켜 제 마음속에 몸을 던지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누가 그를 고해의 그늘에 끌고 들어가 무릎을 꿇린 수 있으랴


슬픔아, 부르면 그도 사람처럼 돌아본다
그는 누구에게도 잘못을 한 적이 없다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문예중앙








그 사람을 내가 산 적 있다 - 박지웅



바람이 노을을 만지자 나비들이 태어났다
당신이 내 입술을 만지자 셀 수 없는 글씨들이 태어났다


입술을 빼앗긴 사람은
입술을 찾기 위해 훔친 자의 곁에 머문다


눈 먼 사랑이 발아래 앞드려 우는 것을 본 적 있다
눈을 돌려달라고 눈 못 뜨고 울던
그 사람을 내가 산 적이 있다


내 이름은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함부로 당신을 만진 뒤의 일이다






# 박지웅 시인은 1969년 부산 출생으로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계간 <시와 사상> 신인상 수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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