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이 센 날의 풍경 - 강인한

마루안 2018. 1. 20. 21:56

 

 

바람이 센 날의 풍경 - 강인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플라타너스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바람 속에 서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으려고 몸을 떨며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흘러가 버린 저녁 구름과 매캐한 소문과
매연과 뻔한 연애의 결말들은 길바닥에 차고 넘쳐
부스럭거리는, 창백한 별빛을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
때 이른 낙엽을 떨군다
조바심치면 무엇하느냐고
지난겨울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나무들은
눈을 틔우고 잎을 피워서 파닥파닥
할 말이 많은 것이다 할 말이 많아서
파닥거린다 춤을 춘다
물 건너간 것들, 지푸라기들 허공을 날아
높다란 전깃줄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소스라치는
저 검은 비닐들을
이제는 잊어야, 잊어야 한다고
빗금을 긋고 꽂히고 내리꽂히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러져 버린 진보와 개혁 그 허깨비 같은 잔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비리고 썩은 양심은 아래로 잦아들어
언젠가는 뿌리 깊은 영양이 되겠지만
뭉칫돈을 거래하는 시궁 속의 검은 혀
아무 데서나 주무르는 시뻘건 후안무치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많아서 상처투성이의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나무들은 바람 속에서 아우성치는 것이다.

 

 

*시집, 입술, 서정시학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 - 강인한


뜨겁게 데워진 돌벽 위에 손을 내밀었다
담쟁이의 망설임이 허공에서 파문을 만들었다
파란 물살에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걸렸다

능소화였다
먼저 키를 늘이는 담쟁이를 보고
봄부터 여름까지의 거리를 능소화는 헤아려 보았다
담쟁이가 가녀린 허리를 가만히 내주었다

능소화는 담쟁이 허리를 껴안고 기어올라
한 덩어리 파아란 불길이 되어 그들은 타올랐다
사나운 비바람이 담쟁이를 흔들자
능소화도 담쟁이도 함께 흔들렸다
담쟁이는 제 가슴에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자랑스러웠다

지열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여름날
목을 꺾고 꽃이 떨어졌다
안아주고 몸을 빌려준 마음을 알았으므로
능소화는 한두 송이 꽃이 져도,
꽃이 져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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