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마루안 2018. 1. 19. 20:54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고독의 작란 - 이병률



혼자서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십육 년을 같이 살았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별을 하겠다고 작정한 사람과 동행하여
결혼식에 가거나 장례식엘 간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의 흔적을 하나둘 없애거나
너무 없애다
무엇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그조차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
옷가지 두어 장을 남겨놓는다


누구도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을 수는 없다
사는 것이 거북해서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이제는 수북한 안간힘을 내려놓고
깨끗이 그래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


혼자 자물쇠를 하나 사서 다리 난간에 채우고
이번만큼은 강물에다 열쇠를 던지지 않는다


열쇠를 스스로에게 합쳐버리고
누군가의 주인이 되거나
누군가에게 유적이 되는 일에
다시는 가담하지 말아야 할 것이므로





# 너무나 시적인 은유를 품고 있는 제목부터 완전한 시다. 누가 그랬던가. 시는 언어의 보석이고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이 시인의 영혼이라고,, 이 말이 맞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이병률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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