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가까운 듯, 먼 듯 - 나호열

가까운 듯, 먼 듯 - 나호열 어제는 눈 내리고 오늘은 바람 몹시 불었다고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나지막한 음성에 놀라 창 밖을 보니 백운대, 인수봉이 가까이 와 있다 늘 마주하는 이웃이지만 언제나 찾아가는 일은 나의 몫 한 구비 돌아야 또 한 구비 보여주는 생은 힘들게 아름다워 휘청거리는 그림자에 등 내밀어주는 침묵 뿐 이더니 곧게 자란 몇 그루 소나무 위의 잔설을 털며 몇 년 묵었어도 아직 향기 은은한 작설 잎을 구름에 씻어낸다 멀리 떨어져야만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람 한 걸음에 다가가면 홀연히 모습 감추는 사람 혹시, 하고 물어보니 눈보라 헤치며 홀연히 자리를 뜬다 간 밤의 긴 갈증 머리 맡에 냉수 한 사발은 그대로인데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포엠토피아 그 겨울의 찻집 - 나호열 이..

한줄 詩 2018.02.15

내 이마의 청동거울 - 임곤택

내 이마의 청동거울 - 임곤택 나무에서 왔으므로 나는 아름답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하라는 충고들이 말꼬리를 잘랐다 가장 굵게 잔뼈가 자란 거리의 이름을 수십 번 부정하고 가르마를 바꾸고 오른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도 닮고 싶지 않았다 발밑이 땅이 아니라는 느낌 어떤 연륜도 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 풀밭에서 듣는 울음소리 원시의 발자국과 무인도의 유칼립투스, 사그락거리는 태고의 모래 해변 내 기억이 아니라는 것 당신은 내 이마 위에 당신의 살이었던 서랍과 빈 상자들 속에 녹청색 어금니와 불안하게 회오리치는 잎맥을 넣어두었다 그렇게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하고 자주 하늘을 보았다는 것 어깨에 떨어진 빛을 발밑에 묻고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 손끝으로 털고 남는 자랑은 당신에게 돌려줄 것이다 ..

한줄 詩 2018.02.15

버리고 갈 것만 남아 - 최정

버리고 갈 것만 남아 - 최정 냉장고는 고장난지 오래 세탁기는 덜컹덜컹 자주 멈추고 텔레비전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언제고 떠나려 새것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다행이지 않다 쓸 일 없어진 침대도 들춰본 지 오래된 책들도 하다못해 서랍에 넣어둔 각종 고지서들도 일일이 확인해 버려야 하고 느려 터진 컴퓨터를 버릴까 말까 도시를 청산하는 일에 버릴 것만 남아 숨만 쉬고 사는 데도 돈을 청구하는 도시에게 조금은 시원섭섭하고 버릴 것들마저 돈으로 계산해 주는 도시에게 차라리 감사해 하며 무엇을 더 버릴까 궁리하는 하루 내 마음에서는 무엇을 버리고 갈 것인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날이 저문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야 하는 깊은 산골에서 늦깎이 농부로 살아남으려면 한 줌 흙..

한줄 詩 2018.02.15

중심, 도처에 우글거리는 - 손진은

중심, 도처에 우글거리는 - 손진은 어떤 힘이 끌어당긴 것일까 혹은 어디로 난 세미한 길을 따라가 버린 것일까 안경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외출 준비를 서두를 때쯤 화장대와 책상 사이 어디 다소곳이 놓여 있던 그가 습관과 이성의 독재로부터 탈출한 어쩌면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놈은 어느 구석에서 내리 쌓이는 먼질 향기처럼 맡고 있을 것인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소리로 웅얼거리고 있는 것일까 내 오감은 그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만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손가락의 세포들 속에서도 나태와 무기력 속에 취한 존재를 흔들어 습관과 이성 반란하는 어떤 힘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아득해지며 나는 생각한다 놈이 내 기억과 촉각을 미끄러져 나갔을 때 내 육안의 사물의 질서는 깨지며 그때 닫혀졌던 진실의 세계가 빼..

한줄 詩 2018.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