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중심, 도처에 우글거리는 - 손진은

마루안 2018. 2. 13. 22:04

 

 

중심, 도처에 우글거리는 - 손진은

 

 

어떤 힘이 끌어당긴 것일까

혹은 어디로 난 세미한 길을 따라가 버린 것일까

안경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외출 준비를 서두를 때쯤

화장대와 책상 사이 어디

다소곳이 놓여 있던 그가

 

습관과 이성의 독재로부터 탈출한

어쩌면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놈은 어느 구석에서 내리 쌓이는 먼질 향기처럼 맡고 있을 것인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소리로

웅얼거리고 있는 것일까

내 오감은 그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만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손가락의 세포들 속에서도

나태와 무기력 속에 취한 존재를 흔들어

습관과 이성 반란하는 어떤 힘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아득해지며 나는 생각한다

놈이 내 기억과 촉각을 미끄러져 나갔을 때

내 육안의 사물의 질서는 깨지며

그때 닫혀졌던 진실의 세계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그들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여 내 품을 떠난 그가

나태와 욕망으로 물든 사물들 어깰 툭툭 치며 깨울 때

모든 사물들 그들의 풍요와 자유를 위해

일시에 부풀어 오르며 넘쳐흐르는 것이겠지

이때 우리가 항용 어지럽혀졌다고 부르는 세계는
더 높은 질서로 팔딱팔딱 숨쉬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중심은 도처에 우글거리며

어느 곳에도 있지 아니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의 실타래가 여기까지 풀렸을 때도 안경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집을 나선다 나는

약속 시간에 떠밀려

어디 구석쯤에서 놈이 부르는 알 수 없는 소릴 뒤로 하고

더러는 전봇대에 부딪쳐

앞 못 보는 내 젊음의 아슬한 균형 잡기도 하면서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민음사

 

 

 

 

 

 

우화등선 - 손진은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는 것
사랑은 꼭 그렇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전 생애를 걸쳐서 계속되는 여행 같은 것
가령 덜 깬 잠의 갈피마다 

찬물 한 줌 쏟아 부으며
오뎅이며 두부를 사라고 외치는 아줌마
시간은 산비탈 깎아 집을 세우고
아줌마 검정 고무신 운동화로 바꾸었지만
머리카락은 새것으로 돌리지 못하지
수십 년래의 바람 햇빛까지도 촘촘히 다져 넣은
어느 사진기도 찍을 수 없을 주름 낀 얼굴로
가끔씩 뒤돌아보며
구겨진 세월의 필름 꺼내 보는
그녀는 젖줄

사람 사는 거리의 남루를 싸고 흐르는 시냇물

꼬불길 오선지 삼아 악보 그리며 가는
가벼운 음표.....

가벼워지며 그녀는 걸을 것이야
끊임없이 시간 속으로

사랑으로 가득찬 황혼 속으로

왔던 길 되돌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행

마침내 그녀 틀고 앉아
누에처럼 실을 뽑을 것이야

뚫고 나올 것이야
우화등선(羽化登仙)

하늘나라에서도
두부며 오뎅 팔러 다닐 것이야

그렇게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야

 

 

 

 

# 손진은 시인은 1959년 경북 안강 출생으로 경북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고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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