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이마의 청동거울 - 임곤택

마루안 2018. 2. 15. 10:08

 

 

내 이마의 청동거울 - 임곤택


나무에서 왔으므로 나는 아름답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하라는 충고들이 말꼬리를 잘랐다
가장 굵게 잔뼈가 자란 거리의 이름을  
수십 번 부정하고
가르마를 바꾸고 오른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도 닮고 싶지 않았다 

발밑이 땅이 아니라는 느낌
어떤 연륜도 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
풀밭에서 듣는 울음소리
원시의 발자국과 무인도의 유칼립투스, 사그락거리는 태고의 모래 해변
내 기억이 아니라는 것

당신은 내 이마 위에
당신의 살이었던 서랍과 빈 상자들 속에
녹청색 어금니와 불안하게 회오리치는 잎맥을 넣어두었다
그렇게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하고
자주 하늘을 보았다는 것 

어깨에 떨어진 빛을 발밑에 묻고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 손끝으로 털고
남는 자랑은 당신에게 돌려줄 것이다

바람의 수령(樹齡)을 세며 천 년 전 강둑에 흔들거린다
나의 일부는 나무를 따라가고 없다

 

 

*시집, 지상의 하루, 중앙북스

 

 

 

 

 

 

플라타너스 - 임곤택


나무에게는 생활이 없다
다만 정중해서 저게 나를 위해 서 있다는 생각
온종일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
오늘 아침 하늘은 가을 하늘 같고
계단을 오른 무릎이 다음 계단의 모서리같이 단단할 때
모서리가 숨이고 근육이고 얼굴이라는 생각
누가 나를 기다린다는 생각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한없이 정중한 나무를 보고
울컥 눈물 쏟아지려는데
내 안에는 그늘도 빛도 없어 슬플 이유도 없고
맹장 떼낸 자국이 가장 큰 상처인, 나를
누가 기다려 주고 있다는 생각
그가 기다린 것은 뻣뻣한 몸이고 단단한 모서리
그렇게 계속 기다려 나무가 풍선이 된다면, 나무가 하얀 사탕이라면
세상은 변하는 것이어서 나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
달라지고 달라져서 문득 나무인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섰다는 느낌
앉지도 눕지도 않고 단단한 모서리로 꽉 차서는
기다린다는 기다렸다는
그 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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