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운수 좋은 날 - 오탁번

마루안 2018. 2. 15. 12:16



운수 좋은 날 - 오탁번



노약자석엔 빈자리가 없어
그냥 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 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
내 앞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 이응 ㆁ 같은
도토리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렸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은
참말, 운수 좋은 날!



*시집, 우리동네, 시안








차일(遮日) - 오탁번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서 잠이 깼다
어?
웬 일이지?
아직 동도 트지 않았는데
웬 차일을 다 치시나?
어제는 혈당 검사 받느라고
피도 꽤 뽑았는데
무슨 기운이 남아서
아닌 꼭두새벽에
내복(內服)빛 차일을 다 치시나?
소나기 주룩주룩 퍼붓는
대낮 길가에서도
한밤 막소주 마시는
포장마차 동글의자에서도
불끈불끈 차일을 치던
그 옛날의 청년이
하도 반가워서
잠든 아내
슬쩍 건드려나 볼까 했는데
나 원 참,
볼 일 보고 나니
금세 쪼그랑 막불겅이가 되네





# 오탁번 시인은 1943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 장갑>, <손님>, <우리 동네>, <시집 보내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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