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일찍 온 저녁 - 허수경

마루안 2018. 3. 5. 19:25



너무 일찍 온 저녁 - 허수경
 


누군가 이 시간에 자리를 내주고 떠났다
아무도 세속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시간
태양은 한 알 사과가 된다


사과와 사과
뉘우치지 못해 어떤 이는 깊게 울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물을 길어 창문을 넘어오기 전
누군가는 태양을 과도로 깎았다
태양 한 조각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 방 안에 같이 사는 거미에게
태양 한 조각 거미줄에 걸어주며
점점 컴컴해지는 내장을 태양 조각으로 밝히고 있다


내장의 구멍은 후세로 난 길
안이 밝아지고 바깥이 어두워질 때
태양을 대신할 천체의 둥근 공들은
태양 한 점씩 먹고 거미줄에 걸려 환하다


그 저녁, 너무 빨리 와서
나를 집어 먹는 짐승은 나다
태양의 마지막 조각을 구멍 뚫린 하늘에 올렸네
젖은 내장도 어둠 속에 걸어두었네


그렇게 한 저녁은 모랫벌 속 바지락처럼 오고
바지락 껍질을 뭉개고 가는
트럭의 둥근 바퀴 밑 어둠 속


쓰게 쓰게 그렇게
조개들은 먼 무덤을 부르다가 잠든다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돌이킬 수 없었다 - 허수경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치욕스럽다, 할 것 까지는 아니었으나
쉽게 잊힐 일도 아니었다


흐느끼면서
혼자 떠나버린 나의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칼은 젖어서
감기가 든 영혼은 자주 콜록거렸다


누런 아이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 가수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누구 때문도 아니었다
말 못 할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터미널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방을 기다렸다


술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


마침내 터미널에서
불가능과 비슷한 온도를 가진
우동 국물을 넘겼다


가방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참, 무참히 돌이킬 수 없었다





# 허수경 시인은 1964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년을 보다 - 김일태  (0) 2018.03.05
오래 두고 온 저녁 - 김명기  (0) 2018.03.05
그는 통속적이다 - 조용환  (0) 2018.03.04
늙은 나무가 사는 법 - 양문규  (0) 2018.03.04
쉰 살의 맨손체조 - 강형철  (0) 2018.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