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추억에게 - 정윤천

마루안 2018. 3. 5. 21:48

 

 

추억에게 - 정윤천

 

 

우리들 여린 발돋음으로 꼰지발을 세우고

거기 이른 저녁별 하나 따 가지고 싶었던

그 봄밤에의 기억,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달마중 핑계로 손잡고 나섰다가

괜한 일로 다투고 왔었던 어떤 일이며

숨바꼭질로 시들해진 해름참이면

영님이네 들집 울타리 바람벽에 기대 서서

먼 산 허리께 걸린 취한 놀빛 속에 취해

우리들 눈길들이 또한 엇비슷한 어지러움 타곤 하였습니다

해 진 언덕 저편으로 겨운 하루나절을 밟고 오시던

우리들 아버지들의 땀내 묻은 머리칼과

무등을 타고 되오던 길에 바라보인

옛집 위의 저문 고적함 너머로

깊어가는 저녁의 연기

그 고운 저물녘에 이제 다시 가볼 수는 없겠지요

살림 났더라는 이야기

언젠가 바람 속으로 언뜻 전해도 전해도 들었습니다만

우리들 잊혀진 날들만큼의

꼭 그만해진 크기의 그리움으로

우연처럼 어디에선가 스치듯 만나지게 된다면

먼 옛날에 불렀던 풀내 묻은 노래 한 구절

입을 맞춘 합창이 되어 되불러보고도 싶었답니다.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실천문학사

 

 

 

 

 

 

감꽃 - 정윤천

 

 

감꽃이 지고 있었지

오목가슴 그 아픈 가슴

익모초 쓴 물에 재워 한세월 달래보시더니

재작년 결국엔 눈 못 감고 세상 뜨신 덕골 아짐

일찍부터 집 나가 지지리도 헛돌았던 네 꼬라지는

우리가 보고 듣기에도 소갈머리 그른 애물이었지

살아 생전 결국엔 얼굴 뵈이지 못하고 말았던

맞춤하게 고운 네 각시의 모습

내외는 어느 사이 저희 닮은 고추도 하나 흘려

궁뎅이도 덩게덩게 암팡지게 키워놓았는데.....

단자길, 아짐의 젯날 저녁은 초생달로 이미 깊어

음복의 입맛 뒤끝이 아무래도 쓰디쓸 때

잔주름 성긴 좁상한 이마 무심결로 쓸어보다 말고

엊저녁 꿈속에선가 제 어머니의 형상

저 감낭구 꽃잎 흐벅한 마당 그늘에

후줄근 혼자 보여 자꾸만 무어라고 조악거리시더라고

눈시울 슬며시 붉힌 네 수그러진 어깨 너머로

감꽃은 마치 때늦은 그의 회한과도 같이

자꾸 지고 있었지

 

 

 

 

 

# 정윤천 시인은 1960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1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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