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 최준

마루안 2018. 3. 5. 21:25

 

 

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 최준

 

 

아버지 오월이면 꽃을 심었다

나는 수조에 물을 담아 연신

꽃이 뿌리내릴 흙을 적셔주고

그러다 그 여자아이 놀러오면 함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꿈을 꾸었다

늘 그랬다 어제처럼 또 그 어제처럼

세월이 세월을 데리고 가고 아버지

천둥 번개 다 맞으셨다 꽃밭에서

꽃처럼 고민하고 햇빛 그리워하고

땀흘리셨다 내리는 햇빛 다 못 받고

흐르는 땀 닦지 않고 아버지

늘 아프고 수척했던 아버지

꽃과 함께 떠나셨다 그 여자아이

잊혀진 꽃말처럼 떠나갔다 새벽이면

의롭게 죽어가는 꽃밭 가득히

서리 내리고, 떨리는

손으로 꽃씨를 받는다

흔적없이 내리는 궂은 비 다 맞으며

나는 떠날 것들의 길을 열어준다 가을

그 길도 비에 젖고 마르지 않고

 

 

*시집, 너 아직 거기서, 도서출판 모모

 

 

 

 

 

 

얼음의 나라 - 최준

 

 

이제, 나는 사랑하지 않으리 너무

초라하고 불필요한 기억의,

없어져도 좋을 그런 고통들, 다만

고통뿐이었던 그것들, 버리고

나는 조금씩 가슴이 추워오고, 내가

버린 집과 들판이 보이던

저녁 창틀의

 

이제, 나는 걸어가지 않으리 손 닿으면

금세 흐름이 멎는 그것들, 멎어서

불투명한 과거들

남겨두지 않으리 흐름은 오직

네 나라의 일 오, 그곳

너만의 일

 

이제, 나는 길고 긴 잠을 자야지

너와의 만남은 꿈속에서의 일

지난것들 모두 꿈이었던 기억 뿐으로

잠만큼 긴 꿈을 꾸리라

꾸리라 어머니 그립지 않고

 

다신 돌아가지 않으리 너의 그곳

그 따스한 불빛, 너처럼

여기서 나는 오래 오래 외로와야지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너 아직 거기서>는 최준의 첫 시집으로 그가 경희대 재학중이던 1987년 11월에 나왔다. 이후 시집으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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