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 최준
아버지 오월이면 꽃을 심었다
나는 수조에 물을 담아 연신
꽃이 뿌리내릴 흙을 적셔주고
그러다 그 여자아이 놀러오면 함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꿈을 꾸었다
늘 그랬다 어제처럼 또 그 어제처럼
세월이 세월을 데리고 가고 아버지
천둥 번개 다 맞으셨다 꽃밭에서
꽃처럼 고민하고 햇빛 그리워하고
땀흘리셨다 내리는 햇빛 다 못 받고
흐르는 땀 닦지 않고 아버지
늘 아프고 수척했던 아버지
꽃과 함께 떠나셨다 그 여자아이
잊혀진 꽃말처럼 떠나갔다 새벽이면
의롭게 죽어가는 꽃밭 가득히
서리 내리고, 떨리는
손으로 꽃씨를 받는다
흔적없이 내리는 궂은 비 다 맞으며
나는 떠날 것들의 길을 열어준다 가을
그 길도 비에 젖고 마르지 않고
*시집, 너 아직 거기서, 도서출판 모모
얼음의 나라 - 최준
이제, 나는 사랑하지 않으리 너무
초라하고 불필요한 기억의,
없어져도 좋을 그런 고통들, 다만
고통뿐이었던 그것들, 버리고
나는 조금씩 가슴이 추워오고, 내가
버린 집과 들판이 보이던
저녁 창틀의
이제, 나는 걸어가지 않으리 손 닿으면
금세 흐름이 멎는 그것들, 멎어서
불투명한 과거들
남겨두지 않으리 흐름은 오직
네 나라의 일 오, 그곳
너만의 일
이제, 나는 길고 긴 잠을 자야지
너와의 만남은 꿈속에서의 일
지난것들 모두 꿈이었던 기억 뿐으로
잠만큼 긴 꿈을 꾸리라
꾸리라 어머니 그립지 않고
다신 돌아가지 않으리 너의 그곳
그 따스한 불빛, 너처럼
여기서 나는 오래 오래 외로와야지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너 아직 거기서>는 최준의 첫 시집으로 그가 경희대 재학중이던 1987년 11월에 나왔다. 이후 시집으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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