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연한 중년 - 문신

마루안 2018. 3. 4. 08:36



우연한 중년 - 문신



처음에는 우연으로 시작되었다
우체국 뒤편
플라타너스가 기립의 자세로 스크럼을 짜고
먼 들판을 지워내고 있을 때


호각 신호처럼 우연한 빗방울이 내렸다
공이 튀어 오르고
그 사이에서 모자를 눌러 쓴 중년들이 배를 밀고 간다
배를 밀어
공을 튀기고 가쁜 숨을 몰아간다


밀고 간다는 건 마음을 앞세우는 것


어디인지 모를 방향을 곁눈으로 가늠하는 사이
헛짚어서
빗방울을 짓이기는 동안에도
밀려간 공은 중년들 가랑이 사이에서 우연히 튀어 오른다
마흔에서 쉰 살까지를
밀고 가는 것은 가쁜 숨이다
중년들
가쁜 숨이 빗방울을 토해낸다
이건
이겨볼 수 없는 우연으로 점철된 젖은 발 젖은 발들


패배처럼 어깨 무너뜨린 빗방울들이 기운다
정수리 가득 뜨거운 것들을 식히느라
눌러 쓴 모자를 벗겨낸다
모락모락 중년이 피어오른다
중년은 말갛다 말간 중년들이 얼룩처럼 흘러내린다
빗방울들이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우체국 뒤편
플라타너스 너머
먼 청년들을 지우며 배를 밀고 가는 중년들
우연히 중년까지 왔을 것이다
또 어딘가에서 공이 튀어 오른다면
중년들
홀리건처럼 무거운 배를 밀기 시작할 것이다



*시집, 곁을 주는 일, 모악








마흔 살 - 문신



사흘 흐리더니 하루는 화창이다


물길 아는 소년에게 삿대를 맡기고는 뱃전에 드러누워 달구경이나 해볼까
달은 싱거우니
아예 멀리 사는 애인에게 기별하여 볼까


뱃전에서
푸른 잎사귀에 싸온 찬밥을 먹는다
조와 수수가 섞여 혀끝이 껄끄럽다
시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묵은 쌀 몇 낱 골라내고 나니


물길이 갈래를 탄다고 소년은 삿대를 놓치고 울상이다
정작 울고 싶은 것은
물길이다
뱃바닥을 떠밀어 올리는 그 울음을 부력이라고 했던가
부력을 거슬러
여에 닿기까지 가쁜 자맥질이나 해볼까


조난이어라
물길이 빠르구나
회귀는 부득이하다 하니 난망이다
소년아
그리고 가뭇한 애인아


사는 일이 마른 밥풀을 떼내는 공갈 젓가락질만 같아서
사흘이 흐리고 하루는 화창이다





# 저절로 왔고 되돌아 갈 수 없는 마흔 살의 고뇌를 이렇듯 절묘하게 묘사한 시가 있을까. 비유와 은유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심금을 울린다. 서정성이 능청스럽게 뚝뚝 떨어지는 시를 반복해서 읽는다. 어쩔 것인가. 어제의 뱃사공은 다시 오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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