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풀내음 - 김창균

마루안 2018. 3. 16. 21:34

 

 

저녁 풀내음 - 김창균

 

 

옛 사람들은 풀이 썩으면 반딧불이 된다고 했던가

 

늦은 가을 저녁 들판에 누워 별들을 본다.

이승의 삶이 깊어져 저렇게

푸른 별로 뜬다는 것이

왠지 낯설기도 하여

자꾸 별들을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까지 푸른빛으로 가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죽도록 푸르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들판의 풀들이 모두 썩어 가을 하늘 별로 뜨는 저녁

그 푸른 저녁 위에 나를 포게 놓으며

또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마른풀 냄새 맡으며 나도

그렇게 며칠 동안 푸르게 나이가 들었으면

그랬으면 하는.

 

 

*시집,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세계사

 

 

 

 

 

 

그믐밤 - 김창균

 

 

삼십 촉 알전구가 어둠을 밀어 내는 저녁이다

이 시간에는 늘 그래 왔듯이

늙을 대로 늙어 주름이 살처럼 굳어 버린 얼굴을 한 아버지가

深海魚처럼 안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그믐밤에는 짐승들이 하얗게 똥을 싸고 가는

텃밭을 내다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올 빠진 털옷처럼 반쯤 넋을 놓고

골방에 담겨

밤참으로 팅팅 불은 국수를 먹기도 했다.

누나를 꼬시러 온 동네 청년들은

바람구멍 숭숭 뚫린 창호지 문을 등진 채

사랑방에서 몇 패를 돌리며 민화투를 쳤으나

시간은 더디게 갔다.

내 오랜 기다림의 끝이었다가

다시 시작인 그 작은 방.

마당 귀퉁이 나이 든 대추나무 위로

싸락눈 쌓이는 소리 점점 사위어가는데

바람은 젖은 옷처럼

내 살에 척척 달라붙었다 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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