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각성제 - 이문재

각성제 - 이문재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태풍 한가운데를 지나 남녘 상갓집 다녀오는 길 기억력이 상했는가 자꾸 눈 들어 뒤를 돌아본다 덕수궁 어귀, 길바닥에 짓이겨진 나뭇잎들이 말간 냄새를 피운다 죽는 것들이 흩뿌리는 냄새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들의 향기 언제 가벼웁다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까 덕수궁 잔등, 재개발 지구, 내부수리한 식당에서 가정식 백반을 혼자 먹는다 가정식? 비가정식 백반도 있을까, 식당에만 남아 있는 가정식으로 혼자 점심을 먹는 중년은 서글프다. 이 지방에서 혼자는 자주 죄악이다 깨끗한 옷, 아니 옷 깨끗하게 입고 수염도 좀 깎고 늘 오른쪽으로 기우는 고개도 좀 반듯하게 하고, 목 뒷덜미 자욱한 비듬도 털고, 이 가을의 변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설익은 중년이 꿈꾸었던 것은 별게 ..

한줄 詩 2018.03.22

그리고 고맙다 나머지 내 몸뚱이여 - 신현수

그리고 고맙다 나머지 내 몸뚱이여 - 신현수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내 대장만은 깨끗할 거라는 참으로 헛된 희망은 무엇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내 몸뚱이에 대해 내가 지난 오십여 년 이상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내가 품었던 말도 안 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망상에 불과한데 내가 평생 내 위에 쏟아 부었던 술 내가 평생 내 폐에 불어넣었던 담배연기 내 대장을 통과했던 기름진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개고기, 오리고기, 양고기, 말고기, 심지어 토끼고기까지 내가 지난 오십여 년 이상 몸뚱이 속으로 밀어 넣었던 온갖 고기들을 생각하면 내 대장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거의 미친 생각인데 대장의 용종이여 미안하다 높은 감마지티피 간 ..

한줄 詩 2018.03.22

지상에서 가장 치열했던 삶의 기록 - 김응수

지상에서 가장 치열했던 삶의 기록 - 김응수 마흔 고개에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뻐끔대는 물고기같이 살 순 없다고 장맛비에 질질 젖은 구두를 끌며 낙향한 사내가 있었네 희망양록원 마지막이라고 마누라도 피붙이도 버린 놈이 이게 마지막이라고 약쑥이다, 칡넝쿨이다 잡풀을 찾으러 비에 젖은 산비탈을 산록처럼 뛰어다녔네 누군가 장대비 속 꼴을 베는 어둠의 동태를 목격했다네 젖은 구두째 문지방에 나부라진 어둠을 보았다고 하였네 저러다간 큰일 나지, 정말 큰일 나지 좋아했던 소주 한잔 하라는 권유마저 마다하고 여름이 되어 드디어 뿔 자를 때가 되었네 녹혈(鹿血)을 받을 때가 되었네 약초를 탄 물에다 너덧 병 활명수를 섞고 마취총을 쏜 다음 얼추 큰 놈 뒷다리를 묶으려는데 벌떡 일어난 녀석의 발길질에 마흔 고개에 홀로 ..

한줄 詩 2018.03.22

그 겨울 낮은 지붕의 기억으로 - 박인숙

그 겨울 낮은 지붕의 기억으로 - 박인숙 어둠을 향한 성급한 질주가 목이 메이도록 두려워 질 때 더는 가벼워 지지 않는 한 순간의 숨이 굴욕적으로 느껴질 때 그곳으로 갔었다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은 낮은 지붕의 작은 성에선 감귤색의 불빛이 새어 나와 지친 발목의 뻑뻑한 허기까지 슬며시 휘감아 주곤 했었다 피지 못한 청춘의 혈흔을 돌보며 그 많은 우회와 그 많은 좌회를 맑은 소주의 흔들림으로 펴내면 아득한 절망도 잠시 둥글어 지곤 했었다 시간이 빼앗아 간 신데렐라의 무도회처럼 잡은 손이 공허해져도 이상하게 슬퍼지지 않던 그 성을 빠져 나와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내딛어야만 했던 나는 무거운 질주가 두려워 체한 어둠을 게워 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겨울 낮은 지붕 안에서 절망과 나누어 갖던 투명한 ..

한줄 詩 2018.03.21

혜성의 꼬리가 돛을 올릴 때 - 김익진

혜성의 꼬리가 돛을 올릴 때 - 김익진 혜성의 꼬리가 돛을 올릴 때 웅장한 마음으로 짠 입술을 지우세요 창백하고 시시한 순간들은 지진에게 맡기고 불운한 출생을 잊으세요 인생의 단계가 바뀌고, 멜로디가 낯설어도 상심의 비명을 인정하세요 신들의 의지와 지혜는 예측할 수 없지만 노래와 춤이 우주를 따뜻하게 합니다 매일 밤 눈물이 뺨에 떨어지더라도 미소 지을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누군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지구도 당신의 심장 박동에 맞추기 위해 천천히 부드럽게 돌고 았습니다 납치된 입에 키스로 독이 채워질지라도 웃음만이 유일한 해독제입니다 악마보다 성경을 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인생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판타지이니 마지막 날까지 우주의 신비를 열지 마세요 신은 잠시 악과 친했던 우리를..

한줄 詩 2018.03.21

나이테 - 이강산

나이테 - 이강산 간판 찌그러진 식당이라면 어디를 가든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 여자의 나이테가 그려진다 얼굴이 쥐 파먹은 고구마껍질 같어, 원 없이들 잡숴.... 어떻게 꽃 피고 단풍 들었는지 알 만하다, 몸통 어디쯤 벌목당했는지 상처가 깊은지 아물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이테가 기울었는지 너희도 자궁 들어내고 집 떠나봐라 고향이 뭔지 새끼가 뭔지 생각이 뒤집힐 것이여.... 모란시장 변두리에서 삼겹살불판을 닦던 큰누님처럼 그 여자, 생의 절반쯤 떠돌았을 게다 알 만하다, 어느 골목엔가 잘못 들어섰다가 양철지붕 고드름이나 찢어진 봉창 따위를 발견하곤 갈 길 놓치고 오늘까지 눌러앉았을 게다 *시집, 물속의 발자국, 문학과경계 근시 - 이강산 간판의 글씨들이 먼 산처럼 흐릿하다 먼 산만 바라보고 살아온 듯한 하..

한줄 詩 201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