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너는, 그래서 나는 - 홍성식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그래서 너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학대와 협잡만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커 가면서도 똑똑치 못했던
그래서 너는,
선생들의 조롱과 따귀를
독점하며 학교를 저주했다
덜렁 불알 두 쪽 개뿔도 못 가진
그래서 너는,
마흔이 다 되도록 주간지 여배우 비키니에
늙은 정액 튀도록 수음(手淫)이나 했다
머리에 서리는 내리고 힘 빠진 무식한 영감
그래서 너는,
촌구석 국가보조 양로원 골방에서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았다
대여 받은 웃음으로
누구보다 세련되게 떠벌이며
비생산적인 말장난에 미혹당하였고
예쁜 마누라와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들을 둔
길거리에서 이쪽을 가리키는 몇몇 손가락
그 거짓 명성에 취해
그래서 나는,
이따위 짓 버리지 못하고
창녀의 간밤 시세에도 못 미치는 헐값으로
랭보와 김남주를 흥정하는가
*시집, 아버지꽃, 화남
슬픈 진군 - 홍성식
모든 정열이 생채기를 만든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리움이 큰 사람들은
매일 밤 잠 못 드는 병에 시달리고
희망을 불신하는 이들일수록
그로 인해 크게 우는데
詩만 읽고도 살 수 있다던
하얀 여자 후배
배기량 3000CC의 자가용을 가진
사내 앞에서 부끄러이 치마를 올리던 날
눈물은 내 몫도, 네 몫도 아닌
우리의 몫이었는데
청명한 꿈일수록 선착순으로
구정물이 끼얹어지고
가난한 소년들은 산업폐기물같은
동정(童貞)을 사창가에 헌납하는데
이 땅에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해가 떠줄까
그러나, 다시 아침이면
태양은 아프게 눈을 찔러오고
전설(傳說)에 매혹 당한 우리의
뒷걸음치는 방법을 모르는 우리의
성큼성큼한 발걸음은 눈물보다 빠르게
우리를 앞서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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