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래서 너는, 그래서 나는 - 홍성식

마루안 2018. 3. 15. 22:52

 

 

그래서 너는, 그래서 나는 - 홍성식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그래서 너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학대와 협잡만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커 가면서도 똑똑치 못했던

그래서 너는,

선생들의 조롱과 따귀를

독점하며 학교를 저주했다

 

덜렁 불알 두 쪽 개뿔도 못 가진

그래서 너는,

마흔이 다 되도록 주간지 여배우 비키니에

늙은 정액 튀도록 수음(手淫)이나 했다

 

머리에 서리는 내리고 힘 빠진 무식한 영감

그래서 너는,

촌구석 국가보조 양로원 골방에서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았다

 

대여 받은 웃음으로

누구보다 세련되게 떠벌이며

비생산적인 말장난에 미혹당하였고

예쁜 마누라와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들을 둔

길거리에서 이쪽을 가리키는 몇몇 손가락

그 거짓 명성에 취해

그래서 나는,

이따위 짓 버리지 못하고

창녀의 간밤 시세에도 못 미치는 헐값으로

랭보와 김남주를 흥정하는가

 

 

*시집, 아버지꽃, 화남

 

 

 

 

 

 

슬픈 진군 - 홍성식

 

 

모든 정열이 생채기를 만든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리움이 큰 사람들은

매일 밤 잠 못 드는 병에 시달리고

희망을 불신하는 이들일수록

그로 인해 크게 우는데

 

詩만 읽고도 살 수 있다던

하얀 여자 후배

배기량 3000CC의 자가용을 가진

사내 앞에서 부끄러이 치마를 올리던 날

눈물은 내 몫도, 네 몫도 아닌

우리의 몫이었는데

 

청명한 꿈일수록 선착순으로

구정물이 끼얹어지고

가난한 소년들은 산업폐기물같은

동정(童貞)을 사창가에 헌납하는데

 

이 땅에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해가 떠줄까

그러나, 다시 아침이면

태양은 아프게 눈을 찔러오고

전설(傳說)에 매혹 당한 우리의

뒷걸음치는 방법을 모르는 우리의

성큼성큼한 발걸음은 눈물보다 빠르게

우리를 앞서만 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