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떠돌이의 기준 - 이용헌

마루안 2018. 3. 16. 20:07

 

 

떠돌이의 기준 - 이용헌

첫째 항성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할 것

둘째 충분한 질량과 중력으로 공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공전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첫째 여성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할 것

둘째 충분한 물량과 완력으로 창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도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첫째 남성 주위를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할 것

둘째 충분한 아량과 매력으로 하트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응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첫째 대상의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할 것

둘째 충분한 주량과 체력으로 사람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딴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나는 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면서

무한대공을 떠도는 당신을 생각한다

첫째도 없고 둘째도 없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리하여 형태도 없고 흔적도 없는

내 마음을 벗어난 궤도 밖에서

나를 지배하지 않으므로 나를 지배하는 당신을 생각한다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천년의시작

 

 

 

 

 

점자(點字)로 기록한 천문서 - 이용헌

푸르디푸른 종이는 구겨지지 않는다

구겨지지 않으면 종이가 아니다

구겨지지도 않고 접혀지지도 않는 것이

하늘에 펼쳐져 있다

새들은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법을 모른다

아무도 새들에게 천문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자유롭다

읽을 수 없는 서책이 하늘에 가득하다

종이도 아닌 것이 필묵도 아닌 것이

사계를 편찬하고 우주를 기록한다

누가 하늘 끝에 별들을 식자(植字)해놓았나

최고의 천문서는 점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가장 멀고 깊은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

나는 어둠을 더듬어 당신을 읽는다

당신의 푸르디푸른 눈빛을 뚫어야만

구김살 없는 죽음에 도달하리라

이 무람한 천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새들은 밤에도 점자를 남기며 날아간다

 

 

 

#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으로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공학과 법학을 공부하였고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