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슬픈 뿌리 - 김점용

슬픈 뿌리 - 김점용 -꿈 31 꽃을 본다 꽃잎이 작고 단정한 진분홍색의 꽃기린이다 잎이 없는 줄기는 가늘다 뿌리가 보고 싶다, 생각하자마자 뿌리가 뽑혀 올라온다 뿌리 끝마다 꽃이 매달려 있다 줄기에 매달린 꽃과 똑같이 생겼지만 아주 작다 그 꽃을 보자 까닭 없이 외롭고 슬프다 누군가 니체꽃이라 일러준다 니체가 맨 처음 발견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빈 화분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오지 않는다 꽃이 꽃에서 오듯 나도 내가 만든 거 아닐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가 잠시 빌린 거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기원이란 바람과 햇살과 물과 먼지가 아닐까 아버지, 호적을 파버리겠어요 대든 적도 있지만 뿌리 뽑힌 꽃을 알몸 알몸의 노래 자기가 세상 전부인 양 우는 어린아이의 저 어마어마한 목구..

한줄 詩 2018.03.26

대화의 일치 - 임곤택

대화의 일치 - 임곤택 그가 물었다, 어두운데 잘 보이지? 가로등이 빗줄기를 비추고 반짝이는 빗줄기를 맞으며 우리는 걷고 있었다 빗방울을 밀쳐내며 지붕들이 조금씩 변했다 빗소리는 벽돌 유리창 취기로부터 왔다 不和의 힘으로 저녁이 깊었다 검은 것 한 덩어리가 지붕을 건너 다음 순간으로 사라졌다 유혹과 애간장의 무늬들이 오밀조밀 빈 곳으로 밀려들었다 귓속에서 젖은 고양이들이 자랐다 어둠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들었던 팔다리를 내리고, 이런 말들로 우리는 남김없이 표현되었다 일치하고 있었다 발, 디딘 곳과 빗방울 그리고 나머지 물기와 어둠 어두운데 정말 잘 보이네, 대답했다 한 걸음씩 옮겨졌다 약동 진입 거부 탈출의 동작으로 몸의 水深이 계속 채워졌다 *시집,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중앙일보플러스 버스 증명 ..

한줄 詩 2018.03.25

그대 아직 순례자의 꿈꾸고 있는가 - 신표균

그대아직 순례자의 꿈꾸고 있는가 - 신표균 낙타 발자국에 고이는 이슬 한 방울 마른 눈으로 받아 마시며 그대 아직도 순례자의 꿈꾸고 있는가 걷다가 걷다가 마중 나오는 신기루에게서 예배당 첨탑 십자가를 보았는가 낙타도 노새도 버리고 오르다 오르다 헐떡이는 가슴 눈감고 껴안은 붓다 너무 무거워 그만 손을 놓쳤는가 들꽃이여 들꽃이여 바람이여 바람이여 주문인들 들리겠는가마는 뒤돌아보지 말고 가던 길 구름 잡고 흘러가게 가다가 가다가 광야에 별 하나 떨어지거든 소리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도 구차한 손 내밀거나 허리 굽힐 생각 말게나 좋아서 하는 일 직업이 되면 저주가 된다는 슬픈 잠언 기억하면서 달빛은 지우고 물소리는 비우면서 쉬엄쉬엄 그대, 발자국 남기지 말고 오늘도 내일도 흘러흘러 가게나 *시집, 가장 긴 말,..

한줄 詩 2018.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