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어둠 휘늘어진 곳에서 보내다 - 천수호

어둠 휘늘어진 곳에서 보내다 - 천수호 가로등 하나, 시골 밤의 바지랑대다 폭싹 꼬꾸라질 듯 삭은 밤이 불빛 하나에 온몸 지탱하고 있다 저렇게 매달리기만 하면 이쪽 끝에 치렁치렁 닿은 어둠의 가랑이 다 젖고 말 텐데 그래도 바지랑대는 저렇게 어둠이 휘늘어진 곳에 받치는 것 당신 보내고 바라보는 가로등 하나 시골 밤의 바지랑대다 내 가랑이 다 젖도록 바라본다 저쪽 끝에서 다시 팽팽히 당기는 당신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감물 - 천수호 감물이라는 잘 지워지지 않는 지명이 있다 슬쩍 스친 지명이지만 가슴엔 한 점 얼룩이 돋아 도톨하게 만져진다 떫은, 목메는 감물 흔적이다 일찍 떠난 내 큰언니의 초경 자국, 한 방울 남짓 떨구고 간 그 댕기 머리 뒷모습을 나 또한 엄마처럼 못다 배웅했는지 삼십 년 ..

한줄 詩 2018.03.31

바람, 어제 빗나간 - 유병근

바람, 어제 빗나간 - 유병근 찢어지는 분수 같은 이편저편의 갈림길 같은 망설임이 있다 쓸개 없는 바람은 쓸개를 모른다 방금 찢어진 바람을 모른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나오고 누군가 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찢어진 분수, 방금 또 찢어지는 회오리 어제 지나간 해거름을 달고 저무는 하늘에 달고 기운다는 말에 달고 엉거주춤한 계산머리 사이에서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긴 꽁무니와 짧은 꽁무니 사이에서 이편과 저편의 빗나간 아비규환은 아비규환을 말하고 있다 *시집, 꽃도 물빛을 낯가림한다, 작가마을 바바람 부딪치는 소리 - 유병근 이 구절 하나는 좀 그렇다 구절이 품고 있는 먹물 같은 거 먹물 저쪽의 어둠 같은 멀리 있는 바다가 흔들리고 방금 지나간 회오리에 흔들리고 흔들리는 바다를 지나간다 저문 날에 저무는 이 구절..

한줄 詩 2018.03.30

달콤한 덫 - 박순호

달콤한 덫 - 박순호 발목이 떨어져나가는 아픔도 모르고 현란한 춤 속에 묻어 있는 향기 오직 절정만을 꿈꾸려는 사람들 입다문 거리에 붉은 덫이 드러나면 쉬운 사랑이 쉽사리 덫에 걸려 옷 벗는 일이 부끄럽지 않는 밤 오늘도 홍등가의 불빛은 외로운 나를 부르지 않는다 *시집,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문학마을사 염세(厭世)의 풍경 - 박순호 1. 깨어나면 알 수 없는 서러움 언제나 그만그만한 크기의 벽지꽃처럼 성장이 멈춰 벽이 되는 밤 벽 속에 갇힌 값싼 꽃 한 송이 이슬방울이 구르지 않고 꿀벌도 나비도 없는 고요한 정원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 시들지 않는 꽃밭이여 2. 태양을 등진 검은 아가리 속 출행랑치는 전철 안 밤낮을 거슬러 돌진하는 지하 세계 그 깊은 안쪽 종착역에서 포기한 사람을 그리워할..

한줄 詩 2018.03.30

안개, 삶의 변방에 내리는 - 최준

안개, 삶의 변방에 내리는 - 최준 때로, 삶보다 더 소중해지는 희망 그런거 생각하는 새벽이면, 내 사는 집 안개에 젖는다 정든 나무들과 네발 달린 짐승들과 아침밥 굶고 찾아 나선 안개의 발원지 속옷과 마음까지 머지않아 적시는 안개속을 오래 걸으면, 나무도 네발 달린 짐승도 살갗에 소름 돋는다 길인 곳 길 아닌 곳 모두 걸어서 나와 나무들 네발 달린 짐승들 무엇하러 집 떠났는지 혼자 있는지 깊이 모르는 안개의 깊이 만큼 햇살 속에서 곧 투명해지는 안개의 무게 만큼 삶보다 더 소중해지는 희망으로 배고프다 *시집, 너 아직 거기서, 도서출판 모모 첫사랑의 투명유리 - 최준 첫사랑의 너는 늘 거기에 있었지만, 나는 늘 그런 너를 훔쳐보고 있었지만, 소나타만 들려오던 너의 방 늘 피아노 건반만 두드리던 너의 손..

한줄 詩 2018.03.30

감나무에 부쳐 - 김추인

감나무에 부쳐 - 김추인 칠순도 몇 번은 지났을 늙은 둥치 꼬부라지고 휜 등 뒤로 옹이 박힌 세월이 머물러 있다 손가락 사이 주르르 새어나가던 물 같던 모래 같던 꽃각시의 놓쳐 버린 시간들이 이 가을, 발갛게 돌아와 서리하늘 높다랗게 들어올리며 어머니- 어머니- 고향 마당이 시끄럽다 큰 놈 작은 놈 잘난 것 못난 것 무지렁이들까지 각질의 비늘 쓰고 앉은 어미의 검은 둥치에 잔가지를 대고 배꼽을 붙이고 떫고 꽉꽉한 속내까지 익히나 보다 발 아래 수북이 벗은 옷이 쌓이고 맨살의 어머니는 떠나갈 종자들에게 마지막 젖을 물리고 있다 *시집, 벽으로부터의 외출, 도서출판 둥지 어떤 외출 - 김추인 이승이란 곳이 가까워 오는지 몇번인가 왔을 바깥이 시끄럽다 어차피 꿈일 터이지만 이런 꿈은 안 꾸는 것이 낫지만 단청..

한줄 詩 2018.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