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대 아직 순례자의 꿈꾸고 있는가 - 신표균

마루안 2018. 3. 24. 20:57

 

 

그대아직 순례자의 꿈꾸고 있는가 - 신표균

 

 

낙타 발자국에 고이는 이슬 한 방울

마른 눈으로 받아 마시며

그대 아직도 순례자의 꿈꾸고 있는가

걷다가 걷다가 마중 나오는 신기루에게서

예배당 첨탑 십자가를 보았는가

낙타도 노새도 버리고

오르다 오르다 헐떡이는 가슴 눈감고 껴안은

붓다 너무 무거워 그만 손을 놓쳤는가

들꽃이여 들꽃이여

바람이여 바람이여

주문인들 들리겠는가마는

뒤돌아보지 말고 가던 길 구름 잡고 흘러가게

가다가 가다가 광야에 별 하나 떨어지거든

소리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도

구차한 손 내밀거나 허리 굽힐 생각 말게나

좋아서 하는 일 직업이 되면

저주가 된다는 슬픈 잠언 기억하면서

달빛은 지우고 물소리는 비우면서 쉬엄쉬엄 그대,

발자국 남기지 말고 오늘도 내일도 흘러흘러 가게나

 

 

*시집, 가장 긴 말, 모아드림

 

 

 

 

 

 

가장 긴 말 - 신표균

 

 

짧으면 석 달 길면 여섯 달

시한부 신경암 환자가

허파로 숨쉬는 이승에서 토해낸

네 마디 말

 

"좋아"

 

"좋아요'

 

"좋습니다"

 

"참 좋습니다"

 

'아빠' 말밖에 모르는 세 살 딸, 두 살 아들과

놀이동산 마지막 나들이에서

회전목마 타는 모습

이동침대에 누운 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말

 

링거에 매달려 하루하루

밤낮이 바뀌어도 한 마디도 없던 그가

저승까지 품고 갈 세상에서 가장 긴 말을 눈에 담는다

 

대답인지 응석인지

"아빠" "아빠" 철부지들 목소리 커지는데

점점 내려앉는 아빠 눈꺼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