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요일 오후 세 시 - 박제영

마루안 2018. 3. 25. 19:04



일요일 오후 세 시 - 박제영



죽어라죽어라 살아야 한다
유전된 누대의 기억,을 더듬어 온 일생
짐작이 가고도 남을 저 휜 허리
늙은 사내는
제 몸보다 더 큰 박스더미를 싣고
제 삶보다 더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일요일 오후 세 시
뙤약볕 좁은 언덕길을 꾸역꾸역 오르고 있다


내려오던 마을버스, 올라오던 승용차, 그 뒤로 줄지어 선 자동차들, 경적소리, 욕지거리, 비키라고 빨리 좀 비키라고,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린다, 뭐야, 뭔 일 났대? 쌈 난 줄 알고 모여든 구경꾼들, 난장 한 가운데 꼼짝 없이 끼어버린,


이제 넘어지면 다시 못일어날지도 몰라
죽어라죽어라 중심만은 놓지 않고 있는
저 늙은 사내


일요일 오후 세 시를 지나고 있다 



*시집, 뜻밖에, 애지








어느 필모그래피의 죽음 - 박제영



충무로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50대의 사내가 죽은 지 7일 만에 발견되었다 그는 <바보들의 행진>의 구두닦이였고, <영자의 전성시대>의 깡패였고, <바람불어 좋은 날>의 식당주인이었고, <만다라>의 걸승이었고, <칠수와 만수>의 페인트공이었고, <남부군>의 인민군 18이었고, <하얀전쟁>의 베트공 13이었고, <악어>의 포주였고, <실미도>의 버스승객 7이었고, 그 사이 한 여자를 만나 동거를 할 때도, 그 여자 아들 데리고 떠나갔을 때도, 그는 스크린 속에서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 촬영 중인 영화의 택시기사역이 일주일 전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촬영장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르는 것처럼, 그의 죽음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 열심히 살았으나 실패한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다. 이런 시를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죽을 준비 되셨나요? 영화 주인공처럼 죽기 딱 좋은 시간은 일요일 오후 세 시다. 다소 어두운 시가 역설적이게 더욱 살고 싶게 한다. 먹을 준비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