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어가는 함바집 - 공광규

마루안 2018. 3. 26. 22:17



늙어가는 함바집 - 공광규



멈춘 시계가 5시 53분을 가리키고 있는 저녁
폐자재가 굴러다니는 강변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은
판자를 덧댄 문을 헌 입처럼 가끔 벌려서
개나리나무에 음표를 매답니다


멀리서 기차는 시간을 토막 내며 철교를 지나고
술병을 세운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얼굴에 팬 주름을 악기처럼 연주하며
뽕짝으로 지르박으로 늙어갑니다


우리가 없는 날에도 기차는 녹슨 철교 위에서
여전히 시간을 토막 내며 지나고
자동차는 요란한 청춘처럼 잘못 살고 있는 중년처럼
몸을 속도를 위반하며 지나겠지요


강물은 길이를 잴 수 없을 만큼 흘러가고
풀잎은 수없이 시들고 또 새잎을 낼 것입니다
몸도 사랑도 꽃대궁처럼 말라 허리를 꺾겠지요
전등은 여전히 인생을 측은하게 비추겠지요


우리가 없는 날에도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
녹슨 난로 옆에는 사람들이 따뜻하게 늙어갈 것입니다
종교처럼 늙어가는 술집의 멈춘 시계는
여전히 저녁 5시 53분을 가리키고 있겠지요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낙원동 - 공광규



평생 낙원에 도착할 가망 없는 인생들이
포장마차에서 술병을 굴린다


검은 저녁 포장도로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붉은 비닐포장 꽃에서
잉잉거리며 일벌 인생을 수정하고 있다


꽃 한번 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열매도 보람도 없이 저물어가는 간이의자 인생을
술병을 바퀴 삼아 굴리는 사이
포장마차는 달을 바퀴 삼아 은하수 이쪽까지 굴러와 있다


소주를 주유하고
안주접시를 바퀴로 갈아 끼우고
술국에 수저를 넣어 함께 노를 젓고
젓가락을 돛대로 세워 핏대를 올려도 제자리인 인생


포장마차가 불을 끄자
죽은 꽃에서 비틀비틀 접힌 몸을 펴고 나온 일벌들이
술에 젖은 몸을 다시 접어 택시에 담는다





# 시인의 세상 보는 방향과 사유가 담긴 좋은 시다. 나는 이 두 편을 공광규의 대표작으로 생각한다. 여러 번 읽고 싶은 시가 좋은 시 아니겠는가. 통통 튀는 요즘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겠으나 이런 시를 읽으면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자 밥을 먹는 저녁 - 권현형  (0) 2018.03.27
한밤중에 문득 - 유용선  (0) 2018.03.26
꽃도 사랑이 있을 때 핀다 - 김병심  (0) 2018.03.26
이 삶 - 황학주  (0) 2018.03.26
슬픈 뿌리 - 김점용  (0) 2018.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