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사람의 재료 - 이병률

사람의 재료 - 이병률 오늘은 약속에 나가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왜 오지 않는 거냐고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십 분이 지나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황급히 일어나 간판을 다시금 확인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다시 앉았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좁디좁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리 되었다 이 바다의 물을 다 퍼서 다른 바다로 옮기는 일들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라 가능했다고 믿었다 꽃이 꽃을 꺾는다거나 비가 비를 마시게 된다는 식의 일들 우정의 모든 사랑이라든가 그로 인해 어제는 가볍지 않았다는 기록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이대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정만으로 이제 감각도 없는 굳..

한줄 詩 2018.03.23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춘분 전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한 사내가 잘못 내린 버스 정거장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고의가 의심되는 사내의 실종 소식은 곧바로 꽃 세상으로 타전되었고 개화 등고선을 한 뼘 끌어올리고 말았습니다 두손매무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만 한 한철 어금니 앙다물고 지낸 겨울의 반란입니다 길을 잃어 본다는 건 금지된 것들에 퍼부어보는 열렬한 항변 이젠 한 뼘 더 높은 데서도 꽃이 피겠습니다 춘분 아침 어디선 꽃 혁명이 불고 있겠습니다 모르긴 해도 찬란한 민란이 어딘가에 있기는 있는 겁니다 *시집, 참 먼 말, 북인 괜찮아 - 유기택 꿈속에서 꿈 이전의 것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봄 이전의 것들도 안 봄이라 해야 할지 못 봄이라 할지 조금 서운해도 좋겠습니다 시청에서 지정한 현..

한줄 詩 2018.03.23

지는 동백을 보며 - 박승민

지는 동백을 보며 - 박승민 내 생(生)의 미등에 빨간불 켜졌다 손톱을 깎아야겠다 수염을 밀어야겠다 얼어붙었던 하늘에 다시 별자리를 잇고 양떼구름을 풀어 염장이를 수소문해야겠다 아직 발이 나지 않은 뿌리에게 싱싱한 단백질을 선물하리라 한때 연적(戀敵)이었던 그대에게 더 이상 사과를 늦추지는 않으리 한세상 살면서 인간이 차려놓은 밥상이란 늘 한두 가지를 빠뜨려서 간이 맞지 않은 것 입맛을 잃듯 길을 잃어버린 생이었다고는 쓰지 않으리 한 계단쯤은 더 내려가서 강물의 마지막 임종을 오래 지켜보리라 그리고 밤이 오면 아무나 붙잡고 용서를 구하리라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그림자의 중심 - 박승민 앞 바지단추를 열고 전봇대에 자기 물그림자를 구불구불 새겨 넣고 있는 저 사내는 왼쪽으로 쓰러질 듯 쓰러질..

한줄 詩 2018.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