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스크 시대의 성선설 - 전대호

마루안 2022. 3. 3. 19:39

 

 

마스크 시대의 성선설 - 전대호

 

 

우리는 가려진 부분을 좋게 짐작한다.

적어도 그는, 확실히 그렇다.

 

마스크 사용이 일상화한 이래로

새삼 깨달은 성선설이라고 하겠는데,

 

지하철에서

건너편 여자를

무심한 척 주시하며

좋은 기대를 부풀리다가

화들짝 실망하는 경험이

하루에도 여러 번.

 

어디 마스크 너머 얼굴뿐이랴, 어쩌면 우린

드러난 것보다 가려진 것에서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리는지도 몰라.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가려진 것들아,

너희가 그를 아무리 배신한다 하여도,

선한 그는 너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마흔 아홉 - 전대호

 

 

1.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천문 관찰이 가능하려면 삶이 대단히 단조로워야 한다. 동지를 며칠 앞둔 아침 베란다 블라인드를 젖히다가, 달이 어제보다 성큼 왼쪽으로 이동한 것을 본다. 그쪽 하늘 검푸른 빛 짙어지고 노란 빛 내리눌려 산의 윤곽 더 예리해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구나. 어제 이맘때의 하늘, 그 밋밋함을 기억하여 지금의 밋밋함과 비교하다니, 이 얼마나 장하고 딱하냐.

 

2.

어제 꿈에 가방을 싸다가 아찔했다. 곁에 친구인지 선배인지는 노랗게 질린 내 안색을 보았을 것이다. 수강 신청만 해놓고 계절이 바뀌도록 코빼기도 안 보인 강의가 한둘이 아니다. 어찌할꼬, 이제라도 사정해볼까. 나는 술이 덜 깼고, 누가 낄낄 웃는다.

 

아침에 온 통신 기술자가 벽 속에서 전선 가닥들을 끌어내 한동안 끊고 잇고 감싸고 하더니 다시 욱여넣는다. 쑥쑥 들어가는 선들. 마지막으로 보이는 웅크린 뒷등을 하얀 플라스틱 마개가 덮는다. 벽 너머 어둠 속 사정 보이지 않지만 남의 일 같지 않다. 나는 가방. 거죽은 제법 품위 있게 낡았지만, 속은 여전히 편치 않은, 어쩌면 못내 편치 않고 싶은 가방.

 

 

 

 

# 전대호 시인은 1969년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독일로 유학해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성찰>, <가끔 중세를 꿈꾼다>가 있다. <지천명의 시간>은 25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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