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호야등 - 김용태

마루안 2022. 2. 28. 21:41

 

 

아버지의 호야등 - 김용태


철없던 때, 결국 
막차를 놓쳤다
잔별들 바람에 쓸리어 가자 잇대어 비가 내렸다
쉼 없이 걸었다

낮에도 혼자 넘기 꺼려하는 진고개
노망든 귀머거리 여자가 얼어 죽었던 움막이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고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낚아 챌 것만 같은
카랑카랑한 욕지거리와 함께
굶은 짐승처럼 오도카니 도사리고 있었다

몇 해 전인가, 아랫말 춘식아재가
술에 취해 돌아오던 길에
도깨비에 밤새 씨름을 하다 살아 왔다던 애장터,
칠흙 같은 이 소나무 숲이 끝나면 그 곳인데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

그 때
불 빛
오, 멀리서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우골탑 신화(牛骨塔 神話) - 김용태

 

 

젊은 아버지께선 정남향, 볕 잘 드는 곳에

그분의 거처를 마련하시고 식구를 늘리셨다

선한 눈매에 다소곳한 표정이 나도 싫지는 않았다

꽃 피고 새 우는 철이면 아침 일찍 아버지는

그분과 밖에 나가시어 땀에 흠뻑 젖어 돌아오곤 하셨는데

그런 날 밤에는 의례히 그의 거처에 들러 거친 손으로

정성스레 목덜미를 쓸곤 하셨다

어머니께선 짐짓 모른 체하시는 것이 속편하신 듯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눈 오던 밤이었던가, 밤오줌 마려워 뜰에 내려섰는데

그의 거처 쪽에서

나직이 속삭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뱃속에 새 생명이 들었으니 몸조심하고

오래오래 같이 살자는,

그분은 말없이 듣기만 하셨고,

홀몸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건네는 단음절 몇 마디가

두 분 대화의 전부였지만 정은 따뜻하고도 깊었다

그리고 두 해 후

그 말씀은 안타깝게 허언이 되고

모녀가 영영 우리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선 종자로 남겨두었던 콩을

솥 안에 모조리 쏟아붓고 그 둘의 아침을 준비하셨다

 

내가 도회지로 떠났던

2월 어느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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