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 김이하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 김이하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지만 고향을 떠난 빈자리에는 언제나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아래 손 떨리는 어머니의 슬픔이 무더기 무더기로 쌓여 코스모스 꽃을 피우고 우리는 돌아가지 않지만 손사래 하염없이 그 계절은 오고갔다, 그때 무엇이 우리의 허전한 등을 덮고 있었을까 가만 생각해 보면 알 것 같다 아주 지나가 버린 날이지만 고향을 떠난 빈자리에는 언제나 미루나무 한 그루 그 희뿌연 모습으로 어머니 살아 어여어여 가거라 하시며 우리들 등을 다독거리던 마음이 세상 쌀쌀한 마음 다 막아 주었겠다 그러나 지금 그 미루나무와 어머니는 우리들의 길에서 한참 비껴 서 계시다 고속버스 차창에 멀리 있는 걸 보면 애초에 이 길이 아니었다 문득 등이 시리다 *시집, 타박타박. 새미 ..

한줄 詩 2018.06.01

늙은 세월이 늙은 사내에게 - 박순호

늙은 세월이 늙은 사내에게 - 박순호 온기 없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꽉 잠기지 않는 삶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틈에서 삭히고 삭혔던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을 것이다 틀어막아도 그 수위를 넘어 볼을 타고 흘러내렸을 것이다 여러 날 필라멘트가 끊겨 있던 전구는 불 밝히는 시늉이라도 내고 싶은지 얇은 유리 막 속으로 햇빛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가 수족(手足)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 들숨과 날숨이 고르게 늙어가는 세월의 몸을 보았다고 한다 쌀을 얻어가며 미안해서 던지고 간 빈말이라 생각했다 또 한 번은 세월이 자꾸만 말을 건네 온다고 한다 돈 만원을 빌리며 멋쩍어서 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세월이 늙는다니,,,, 세월이 말을 건네 온다니,,,, 고창병원..

한줄 詩 2018.06.01

떠나가는 길 - 박남원

떠나가는 길 - 박남원 누가 와서 묻거든 누가 와서 반쯤 허전해 하는 얼굴을 하고 그 역시 바람부는 달밤의 길을 건너와 표정도 없는 흐릿한 음성으로 나를 묻거든 떠나더라고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더라고. 노상 바람은 그렇게만 불고 창문 밖 부딪치는 이슬 떨어지는 찬 이슬을 밟으며 꺼진 보안등 밑을 말없이 떠나가더라고 그의 물음은 한낱 내 없는 배경에 와서 머무르고 몇 마디의 머뭇거림도 멎은 후 세상에 나서 한번도 날아보지 못한 나무새 그림자는 탁자 위에 늘 엎드리어 있고 철제 난로 속 손짓하다 손짓하다 떨어지는 불의 꽃잎들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알리라 있어야 할 곳에 그대 없음을 그렇게 많은 물살이 그대와 내가 그리고 또 다른 남이 하나씩 모여 한곳에 고이기도 전에 여기는 우리가 너무 성급..

한줄 詩 2018.05.31

때론 이 배역을 버리고 싶다 - 김추인

때론 이 배역을 버리고 싶다 - 김추인 짐짓 손수건만한 여백으로 비워 둔 마음 자리에 넌 언뜻언뜻 향기처럼 떠올라 한 두루마리의 신기루를 지어 올린다 잠깐 화려했다가 오래 날 갉는 너의 영상은 내 슬픔의 진주를 덧씌우고 덧씌워 가슴 알갱이 알갱이가 맵고 아리다 네 적막이 사막보다 더 막막할 즈음은 숨겨 둔 낙타 한 마리 정강이를 세워 길고 먼 실크로드 너를 따라가게 한다 이 지상에는 몇 개의 사막이 환상처럼 남아 바람과 모래와 태양의 추위와 전갈과 오아시스의 오, 사신(死神)과 사람과 사랑이 정답게 동행할​ ​열사의 땅을 낮달 하나 걸어 놓은 채 날더러 따라가게 한다 로렌스여 좆아도 좆아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 아득히 흔들리는 너를 따라 *시집,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의보, 청하 그르니에의 강의실 - 김추..

한줄 詩 2018.05.31

뱀의 둘레 - 백상웅

뱀의 둘레 - 백상웅 제 꼬리를 삼키고 있는 뱀을 그린 그림을 본다. 목구멍 속으로 천천히 암전되어가는 몸통을 지켜보는 뱀의 눈알을 본다. 항문으로 항문이 나올 수 있을까. 바람은 내장 어디쯤에서 폭발할까. 내 미간의 주름이 아버지를 닮아갈 때마다 당혹스럽다. 그처럼 삽을 들고 터널을 뚫으며 열차의 꼬리만 갉아먹으며 살 것 같다. 살이 살을 파고든다는 것은 내가 나를 씹어 삼킨다는 것. 아버지가 나를, 내가 아버지를 꽁꽁 묶어 암전된 몸통 속으로 끌고 간다는 것. 터널 속을 통과하는 바람이 살갗에 달라붙을 때마다 나는 몸통 속에서 기적을 울리며 굴러가는 바퀴를 생각한다. 누가 자꾸 올가미를 던지는 것일까. 알면서도 나는, 어금니에 소용돌이를 꽉 물고 아버지를 닮아간다. 길은 위장 속으로 길을 끊임없이 밀..

한줄 詩 2018.05.31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 허수경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 허수경 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울고 있는 가수 - 허수경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니 그러나 울 수 있었던 날들의 따뜻함 나도 한때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돌담에 기대 햇살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네..

한줄 詩 2018.05.31

어제의 역습 - 박순호

어제의 역습 - 박순호 눈빛을 거두지 않고 노려본다 발톱을 땅에 박고 눈알이 벌겋게 되도록 이를 악물면서 버틴다 진이 다 빠진 몸뚱이에 걸려 있는 하얀 얼룩들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자위를 하는 밤 알고 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못 이기는 척 엎드려 있었다는 사실을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지만 잠깐 동안의 쾌감은 웃자란 패배를 잘라내는 힘이기에 나의 서식지로 날아든 새 떼이기에 그러나 오늘은 봐 줄 기세가 아니다 그믐처럼 다가와서 삽시간에 내 얼굴을 감싸는 검은 망토 어제의 역습이 시작된다 공포를 가르며 휘두른다 무방비상태로 얼어붙은 몸 이를 악물고 힘줄을 세워보지만 위태롭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제로부터 시작된 고통이 *시집, 승부사, 애지출판 단칸방 - 박순호 사람들은 고독한 햇살 ..

한줄 詩 2018.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