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노부부 - 정호승

노부부 - 정호승 너거 아버지는 요새 똥 못 눠서 고민이다 어머니는 관장약을 사러 또 약국에 다녀오신다 내가 저녁을 먹다 말고 두루마리 휴지처럼 가벼운 아버지를 안방으로 모시고 가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늙은 팬티를 벗기신다 옆으로 누워야지 바로 누으면 되능교 잔소리를 몇번 늘어놓으시다가 아버지 항문 깊숙이 관장약을 밀어넣으신다 너거 아버지는 요새 똥 안 나온다고 밥도 안 먹는다 늙으면 밥이 똥이 되지 않고 돌이 될 때가 있다 노인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사촌여동생은 돌이 된 노인들의 똥을 후벼파낼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또다시 늙는다는 것은 밥을 못 먹는 일이 아니라 똥을 못 누는 일이다 아버지는 기어이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다녀오신다 이제 똥 나왔능교 시원한교 아버지는 못내 말이 없으시다 어머..

한줄 詩 2018.05.30

적당한 때 - 임곤택

적당한 때 - 임곤택 춤추며 손목 끌던 것들 끝내 나를 버리는가 어떤 생각은 가시가 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커다랗게 몸을 부풀린 작은 것의 몸집 시들 것은 꼭 그렇게 시드는데 저녁을 부르면 겁먹은 짐승 한 마리 온다 선인장을 기를 때처럼, 물을 주거나 버려두거나 무엇을 기다린다면 정류장은 무관한 버스들로 꽉 차고 손가락을 명주에 감싸 불태운 사람을 안다 적당한 봄비었는지 그렇게 저녁을 기다린다고 말하면 무서운 짐승 한 마리 온다 송곳니와 빳빳한 눈썹 세워 으르렁거린다 거기 엉긴 적의와 꽃잎들을 나는 하나씩 떼어내야 하는가 배고를 때 허기, 라고 잘라 말하기 망설인다 그렇게 별말 없이 열 번 이상 손가락을 불태우고 선인장을 기르고 다가오는 사랑은 끝내 지켜보고 *시집,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문예중앙 모..

한줄 詩 2018.05.29

살아 있는 구간 - 박승민

살아 있는 구간 - 박승민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릴 때 진짜 버리는 거다. 길은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끝날 때 비로소 끝난다. 그 살아 있는 한 구간만을 우리는 뛸 뿐이다. 저의 몸이 연필심처럼 다 닳을 때까지 어떤 흔적을 써보는 것인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부여받고 평생, 눈밭에서 제 냄새를 찾는 산 개처럼 킁킁거리다가 자기 차선과 남의 차선을 넘나들며 가는 것이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기 전까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오는 파도처럼 자기를 뒤집기 위해 자기 목을 조우지만, 눈밭에 새긴 수많은 필체 중 성한 문장은 없고 잘못 들어선 차선에서 핏덩어리로 뭉개지고 있는 몸. 쏟아 붓는 백매(白梅)는 얼굴에 닿자마자 피투성이 홍매(紅梅)로 얼어붙는다. 자신의 영정(影幀)을 피하듯 모두들 눈길..

한줄 詩 2018.05.28

짧은 윤회 - 채풍묵

짧은 윤회 - 채풍묵 아내가 백팔 배를 하는 동안 나는 딸아이 손을 잡고 푸른 구름과 흰 구름 사이에 떠있다 딸과 걷는 불국사 바깥마당은 다리와 다리 사이를 오가며 유년과 중년이 함께 하는 짧은 윤회, 노을빛 문 너머 불국토를 보려고 직경 오 리의 바윗돌이 다 닳도록 오며 가며 옷자락을 스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한번은 청운교 젊은 쪽에 서서 또 한번은 백운교 늙음 쪽에 서서 이끼 낀 석축같이 얼굴을 포개고 현재를 과거로 만들고 있다 *시집, 멧돼지, 천년의시작 생일날, 봄날 - 채풍묵 삼백오십만 년 전 인류 출현 이래로 어떤 면에서 역사는 생일의 기록이다 일만 년 전 문명의 씨앗종자가 울타리 안에 하얗게 뿌려졌고 보편성이란 종교가 뒷골목을 걸어 들어와 양심의 가로등을 켠 것이 이천..

한줄 詩 2018.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