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외뿔소자리 - 안숭범

마루안 2018. 6. 1. 20:38



외뿔소자리 - 안숭범



무엇이든 증발하기 좋은 시간
저녁이 나눠 주는 어둠의 지분에
길의 윤곽이 사라지고
길 위에 뒤채였던 사연들이 어둑해진다
자동차와 사람들이 서로를 아득하게 횡단한다


빠져나가지 못한 사연이 이룬 생의 소란과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찾아 주지 않는 아들을 둔 노모의 가판대에서
가래떡과 출처 없는 메아리가 덥혀질 때
지금쯤 닿아 갔으면 좋을 거리들을 이야기했다
단호히 버려진 시간의 무게로
고물들이 저들끼리 주저앉을 때
이제 와 믿지 못하겠다며 뱉어진 이상과
단단했던 이데올로기들을 이야기했다


길 없이 내게 닿아 온 누군가
슬프게 허공에서 어슬렁거린다
진눈깨비, 이미 다한 그의 사연이
증발할 미래에 근접해 가는 것이 보인다
내 그리움도 누군가의 오랜 풍경이 되지 못했다
이 굴절되는 길 위에서 정녕 물이 되고 말


그립다 말하는 건 한 풍경에의 뒤늦은 집착이다
그래서 오늘은
늙은 우체통 안을 채운 저녁과 더불어
누군가의 오랜 정물이 되어 주기로



*시집, 티티카카의 석양, 천년의시작








미열 - 안숭범



아무 말 없이 기도 안에 들이던 풍경을 포기하노니
지금은 염세적인 사연들이 후두둑 피고 지기 좋은 온도입니다


이렇게 오는 밤에
제가 불렀던 노래의 살점을 주우며
빛이 간질이지 못하는 심해를 걱정한 적 있습니다


세계는 여전히 정확무오합니다


아홉 살의 낮에
세계가 스스로를 지탱하는
그 단호한 균형을 본 적 있습니다
그날 이웃집 유리창을 깨고 도망간 진범은 누구였을까요
이웃과 엄마에게 번갈아 멱살 잡힌 후
단층집 단칸방 창틈으로 석양은 제 살을 내려놓았습니다
단지 원했던 건, 원하기만 했던 건
언제든 불가능한 도시락 반찬과
로봇 장난감과 24색 크레파스였습니다


저를 떠돌다 정작 저만 두고 떠날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제 깨진 그릇 밖으로 친구 몇 명이 펴편이 됩니다
숨죽이던 미래는 하나둘 다른 이의 오늘로 갑니다
제 눈이 오래 매만진 것들이 종종 저를 찔러댑니다
이를테면 빛바랜 이불과 휜 젓가락과
그래도 엊그제 다시 주문한 중고 책 같은 것 말입니다


손바닥을 오므리자
저를 맴돌던 그늘이 오래된 항해로를 그립니다
움키려던 습관이 만든 번잡한 길들


북극의 해수면이 한 눈금씩 높아진다는데
내 탓이 아니라 하는데






# 안숭범 시인은 1979년 광주 출생으로 2005년 <문학수첩>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2009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최우수 신인평론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티티카카의 석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