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때론 이 배역을 버리고 싶다 - 김추인

마루안 2018. 5. 31. 19:41

 

 

때론 이 배역을 버리고 싶다 - 김추인


짐짓 손수건만한 여백으로
비워 둔 마음 자리에
넌 언뜻언뜻 향기처럼 떠올라
한 두루마리의 신기루를 지어 올린다

잠깐 화려했다가
오래 날 갉는
너의 영상은
내 슬픔의 진주를 덧씌우고 덧씌워
가슴 알갱이 알갱이가 맵고 아리다

네 적막이
사막보다 더 막막할 즈음은
숨겨 둔 낙타 한 마리
정강이를 세워
길고 먼 실크로드 너를 따라가게 한다

이 지상에는 몇 개의 사막이
환상처럼 남아
바람과 모래와 태양의
추위와 전갈과 오아시스의
오, 사신(死神)과 사람과 사랑이
정답게 동행할​
​열사의 땅을
낮달 하나 걸어 놓은 채
날더러 따라가게 한다

로렌스여
좆아도 좆아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
아득히 흔들리는 너를 따라

 

 

*시집,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의보, 청하

 

 

 

 

 

 

그르니에의 강의실 - 김추인

 

 

가장 미천하고

부질없는 주제를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일

 

그보다 더 멋진 일이 있는가

 

무언가를 누군가를 위한다는

이 부질없는 일이

삶의 고리이며

존재의 열쇠이며

시간이란 괴물과 대적할 유일한 무기라는 것

기다리는 동안의 재미있는 놀이라는 것

 

그보다 더 멋진 일이 있는가

 

큰 일도 작은 일 못지않게 작고

작은 일도 큰 일 못지않게 큰

세상만사 어차피 얼음조각

 

이리 허망하고 부질없는

한때의 카니발을 위해

죽도록 사랑하는 일

 

그보다 더 멋진 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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