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세월이 늙은 사내에게 - 박순호

마루안 2018. 6. 1. 20:25

 

 

늙은 세월이 늙은 사내에게 - 박순호

 

 

온기 없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꽉 잠기지 않는 삶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틈에서 삭히고 삭혔던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을 것이다

틀어막아도 그 수위를 넘어 볼을 타고 흘러내렸을 것이다

여러 날 필라멘트가 끊겨 있던 전구는 불 밝히는 시늉이라도 내고 싶은지

얇은 유리 막 속으로 햇빛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가 수족(手足)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

들숨과 날숨이 고르게 늙어가는 세월의 몸을 보았다고 한다

쌀을 얻어가며 미안해서 던지고 간 빈말이라 생각했다

또 한 번은 세월이 자꾸만 말을 건네 온다고 한다

돈 만원을 빌리며 멋쩍어서 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세월이 늙는다니,,,,

세월이 말을 건네 온다니,,,,

 

고창병원 병실 벽 하나를 두고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먼저 가신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 듣고 할아버지 눈가에 고인 눈물

나는 눈물방울에서 세월을 보았다

(병실 유리창에 비친 당신의 모습이 세월이었으므로)

서로의 깊은 눈을 들여다보며 할머니를 따라 세월을 데리고 가신 할아버지

죽음의 인기척을 느낄 나이가 되면 함께 지내왔던 늙은 세월이 말동무가 되어 준다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긴 꽁무니까지 끌고 들어와 노인의 옆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을 달빛

"오늘 낮에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하더구나"

저녁 밥상에 마주앉은 어머니의 표정이 어둡다

 

 

*시집, 무전을 받다, 종려나무

 

 

 

 

 

 

독거노인 - 박순호

 

 

노을이 산 모가지까지 차오른 여름의 끝

한낮을 이끌던 태양이 공원에 버려진 공처럼 작아지다가

저녁바람에 흩어져 날렸다

 

언젠가부터 공원은 노인의 것이 되었다

배고픈 비둘기도, 포플러나무도, 파고라 지붕을 덮은 등나무도, 가로등 불빛도

아이들은 공원을 떠나 넓은 운동장으로 모여들었고 

햇볕에 내다 넌 이불처럼 그렇게 노인의 차지가 되었다가

밤이 되어서야 차가운 밤공기에게 자리를 내주곤 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큰 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지나가는 행인 중의 하나였다)

그저 사람들이 앉아 있었거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흔들어 깨우듯

등나무에 기대 잠든 노인 쪽으로 빈 그네 줄이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른 새벽 파지와 빈 병을 줍던 할머니의 놀란 손길이 노인의 죽음을 알려왔고

살아 생전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일 없었다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노인의 단칸방에는 찌그러진 냄비가 향로를 대신해주고 있었다

 

고물상 같은 기억을 몰고 가는 거리

사람들은 낡은 기억들을 하나씩 버리면서 저녁놀을 품어보겠지만

등나무 가지에 내어 걸린 보라색 등 하나 켜지 못하고

노인을 기다리는 낡은 지팡이가 단칸방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