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조장(潮葬)은 어떨까 - 강형철

조장(潮葬)은 어떨까 - 강형철 히말라야 산록에 살고 남은 육신을 토막 쳐 독수리에게 공양하는 천장(天葬)이야 아름답지만 뜯고 남은 뼈를 갈아 고명처럼 짬빠를 뿌려 독수리들이 남김없이 먹고 나면 흔들리는 들풀 따라 적셔진 핏방울도 하얗게 마른다지만 천장 터에 남은 도끼나 칼이 너무나 섬뜩해 아무래도 죽음의 방법으론 좀 거시기해 해망동 조금 못 가 죽어 뒤집힌 망둥어가 누워 있는 서해 긴 썰물 뒤 개펄에 알몸으로 엎어져 짱뚱어에게 한 입 병어에게도 한 입 그렇게 뜯겨 사라진다면 그래도 남아 개펄에 남은 것이 있다면 흐린 하늘 사이로 간신히 빛나는 햇살에 가끔 옆구리께도 말리면서 발가락 무좀도 삭히면서 슬슬 부는 바람에게 마지막 선처를 부탁해 그냥 젖어 사라질 수 있다면 이를 일러 조장(潮葬)이라 부르고 나..

한줄 詩 2018.05.28

가벼운 목숨 - 조찬용

가벼운 목숨 - 조찬용 감춰 둔 보릿자루 내밀듯 뒤늦게 손을 들어 막차를 놓치지 않겠다고 투병하는 아버지 부산 큰딸네 집 옆 무슨 대학병원인가에 후두암으로 몇 주 입원을 하셨다 오뉴월 해는 무장 길어 급한 김에 널려놓고 온 논일 밭일을 생각하면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데 병실에 들어앉아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어머니의 심사 살다고 속 썩고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몇 번의 보따리 고비를 생각하면 당장에 팽개치고 나 몰라라 싶을 미움이 앞서지만 늘그막이 불쌍하여 5 년만 더 살아줬음 좋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아직도 모를 두 분 사이 언제 퇴원이 될지 모를 입원에 괜시리 사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병원비 많이 나오면 근근히 먹고 사는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했던 어머니의 실언 "인자 살 만큼 살았싱게 아덜덜 생각히서 ..

한줄 詩 2018.05.27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 이강산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 이강산 그 새는 국립대전현충원 제15묘 육군하사 서격춘의 묘와 육군상병 서한원의 묘 사이로 내려앉았다 폭설에 간신히 발목만 파묻힌 채 어디로 갈 것인가 두어 번 방향을 바꾸며 두리번거리던 그 새는 해군상병 연준모의 묘를 향해 뒤뚱뒤뚱 걷다가 푸드득 눈을 털고 날아올랐다 얼어붙은 주검과 주검 사이 내려앉은 그 새는 이만 개의 화강암 비석을 숲으로 여겼을까 폭설 속 저 붉고 푸른 이만 개 원색의 조화(造花)가 꽃인 줄 알았을까 새의 무게만으로도 저렇듯 선명한 발자국을 본다 십 년 전의 추억과 일 년 전의 추억 사이에 떠난 사람과 돌아온 사람 사이에 내려앉아 뒤뚱거리는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 어디쯤에서 날아올라야 하는 걸까 어디선가 이명처럼 새가 울고 새 울음 내려앉는 비석들 사..

한줄 詩 2018.05.26

비밀의 문 - 이용헌

비밀의 문 - 이용헌 ​ ​ 나무 위에도 문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 한 사내가 제 몸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하늘로 떠났다 주머니에선 하늘로 가는 차표 대신 한 장의 쪽지가 발견되었다 쪽지에는 그가 사랑했던 이름들과 뜻 모를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몸만 남겨두고 영혼은 사라진 문의 비밀번호가 궁금했다 ​ 날이 밝기 전 사내는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을 것이다 일생을 열고 닫았던 문과 문마다 그의 지문이 파문을 그렸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택시 문을 닫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지상의 마지막 문을 닫았다는 걸 안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그는 왜 소리마저 다 걸어 잠그고 하늘로 갔을까 ​ 날개를 잃은 새는 하늘을 날 수 없어도 몸뚱이를 잃은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법 ​ 그는 한 치..

한줄 詩 2018.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