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네킹 몽정 - 조용환

마루안 2018. 6. 5. 22:06



마네킹 몽정 - 조용환



더 이상 사랑은 없었다
그이는 주문제작을 위해 가공의뢰서를 작성했다
헤어스타일, 키, 이목구비, 성적 취향까지.....
그러나 명백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춤이라도 추어야겠다 팔다리를 휘둘러댄다
막춤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인간의 몸짓
그러나 이곳은 늘 어울리지 않는 무대였다
가방을 둘러맨다 바벨의 지도는 없지만
피해망상의 날씨는 매일 반복되고 또 증식되었으니
섹시한 여배우처럼 애증의 반려,
키스는 멀어도 그 입술은 기념품처럼 남는 것
더 이상 그리움이 없을 때
더 이상 삶이 없다고 말해야 할까
그것은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규격에 맞춤된 몸이 마지막 반전일까
수치도 열망도 사라지면
오르가즘을 경전으로 모실 먼 훗날이라고 말해야 할까
사랑 없이도 사랑할 수 있겠지만
밤 창문을 젖히면 위대한 예언처럼
마지막으로 자위를 배우지 못한 걸 후회해야 할까
끔찍하게도 번화한 숲을 산책하며 그이는 깨닫는다
배달된 사랑은 불량품이었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타구니를 더듬는다
이게 암컷인지 수컷인지,
문득 멈춰 서서 옷을 훌훌 벗어야 했다



*시집, 냉장고 속의 풀밭, 문학의전당








엔딩크레디트 - 조용환



영화는 끝나고 뿔뿔이 떠난다
지금껏 살았던 덕지덕지 얼크러진
생시(生時)가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동안
스크린은 총천연색 앙금들을
되삼키고 있다
결국 어떤 삶이 있었지만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어둠뿐인 장면은
길고 긴 고백을 기억해줄 창문은
애초부터 없었다
반전이 없는 드라마를 살았던 것을
비상구는
예언자는 끝내
아무런 증언도 해주지 않았던 거다
질겅거리던 팝콘 냄새는 쉽사리 가시지도 않고
가로등은 또 부활한 척하며 기다리지만
극장에서 극장으로
묘지에서 묘지에로
진짜처럼 가짜처럼
그리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음소거 된 벽을 빠져나와 거리를 질주한다
불멸이 용이해진 것이다





# 조용환 시인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98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뿌리 깊은 몸>, <숲으로 돌아가는 마네킹>, <냉장고 속의 풀밭>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먹이 - 조성국  (0) 2018.06.05
어느 비가 왔다 간 것일까 - 김정수  (0) 2018.06.05
홀로 마당에서 - 남덕현  (0) 2018.06.04
영도다리 - 김수우  (0) 2018.06.04
눈꺼풀 그 장막 - 윤의섭  (0) 201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