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마루안 2018. 6. 3. 21:38

 

 

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지붕 위 붉은 선인장 꽃은 며칠째 떨어지지 않았고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캄캄해져버린 안부만 왔다

 

예리한 가시를 키우던 선인장은

죽을힘을 다해 뾰족해지는 법을 물었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얀 나비를 꽂은 소녀에게로 갔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수직만을 고집했다

 

침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어서 더 아프다

 

꼿꼿한 가시 속에 숨겨놓은 손바닥만 한 잎보다도

꽃잎을 포기 못하는 선인장보다도

 

물어볼 수 없는 전갈인 너와

쓸 수 없는 답장인 나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이 계절과 저 계절의 경계에서는

언제나 계절보다 먼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는 것을

 

비가 오면 가장 먼저

무릎이 시리다는 것을

 

지붕 위를 맴돌던 붉은 달이 소리 없이 졌다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천년의시작

 

 

 

 

 

 

1막 1장 - 이기영

 

 

잡식의 습성으로 발효된 오랜 불안이

발목을 잡아당긴다

 

길거리의 생활에서 터득한 지혜라면

운명을 우연의 반복으로 긍정해야 한다는 것

 

자동차 바퀴 옆에서 최대한 웅크린 채

움직이는 그림자를 재빠르게 가늠해보다

아주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이유 없이 적의(敵意)로부터 가능한 멀리 있어야 한다는 것

 

단지 이름만으로도 뒷모습을 품는 종족이 있다

 

두려움은 배고픔이나 적이 아니다

용납하지 않은 세계를 기웃거리면서

후미진 뒷골목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방식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무엇인지도 모르게 왔다 가버린 사람을

이번 계절이라 착각하며

노란 눈동자가 다시 젖는다

 

 

 

 

# 이기영 시인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제3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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