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지붕 위 붉은 선인장 꽃은 며칠째 떨어지지 않았고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캄캄해져버린 안부만 왔다
예리한 가시를 키우던 선인장은
죽을힘을 다해 뾰족해지는 법을 물었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얀 나비를 꽂은 소녀에게로 갔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수직만을 고집했다
침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어서 더 아프다
꼿꼿한 가시 속에 숨겨놓은 손바닥만 한 잎보다도
꽃잎을 포기 못하는 선인장보다도
물어볼 수 없는 전갈인 너와
쓸 수 없는 답장인 나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이 계절과 저 계절의 경계에서는
언제나 계절보다 먼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는 것을
비가 오면 가장 먼저
무릎이 시리다는 것을
지붕 위를 맴돌던 붉은 달이 소리 없이 졌다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천년의시작
1막 1장 - 이기영
잡식의 습성으로 발효된 오랜 불안이
발목을 잡아당긴다
길거리의 생활에서 터득한 지혜라면
운명을 우연의 반복으로 긍정해야 한다는 것
자동차 바퀴 옆에서 최대한 웅크린 채
움직이는 그림자를 재빠르게 가늠해보다
아주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이유 없이 적의(敵意)로부터 가능한 멀리 있어야 한다는 것
단지 이름만으로도 뒷모습을 품는 종족이 있다
두려움은 배고픔이나 적이 아니다
용납하지 않은 세계를 기웃거리면서
후미진 뒷골목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방식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무엇인지도 모르게 왔다 가버린 사람을
이번 계절이라 착각하며
노란 눈동자가 다시 젖는다
# 이기영 시인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제3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극락조 염전 - 최준 (0) | 2018.06.04 |
---|---|
인연에 관하여 - 박수서 (0) | 2018.06.04 |
미자의 오십견 - 박철 (0) | 2018.06.03 |
저녁이 오고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 조길성 (0) | 2018.06.03 |
여름 지리산 - 김인호 (0) | 2018.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