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빛의 거리 - 김해동

마루안 2018. 6. 4. 21:21

 

 

빛의 거리 - 김해동

 

 

할머니는 사람이 죽으면

다른별에서 태어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 별에서 살다가 죽으면

또 다른 별에서 태어나고

그렇게 수없이 죽어서 끝없이 태어나다 보면

우리의 영혼은 우주 끝가지 갈 수 있을까

빛은 1초 동안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그 속도로 지구에서 달까지는 1초 조금 넘게 걸리고

태양까지는 500초

안드로메다 은하계에서 지구까지는

2백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랴

아침마다 달려오는 이 빛이 2백만 년 전

안드로메다 자리에서 달려온 것이라면

안심하라

너의 죽음마저도 안심하라

천당과 지옥마저도

광활한 빛의 대지에 쏟아버리고

영원의 시간이 보내준 이 빛과 함께

무수한 영혼들이여

빛의 거리를

믿고 사랑하라

 

 

*시집, 비새, 종문화사

 

 

 

 

 

 

결혼식 - 김해동

 

 

성당에서는

결혼식과 장례식이 같은 제대에서 이루어진다

 

목에 나비 띠를 동여맨 신랑 앞으로

상여처럼 흰 드레스를 끌며 가는 신부

각자 달려온 마지막 길 위에 섰다

무채색의 예복 속에 오색 융단 같은 욕망을 감추고

백년을 기약하면서 또 다른 생활을 강요 받는다

카메라 셔터가 터지고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화동이 먼저 걸어간다

천천히 흩어지는 결혼행진곡

영원을 꿈꾸며 하얀 꽃가루를 밟는다

기뻐도 우는 것이 사람만의 우화인지

가슴 터져 나오는 이 물질은 분명

서로의 육신을 태울 불길이 될 것이다

 

부케에 묶인 정념이여

나는 너의 꿈이 되어

너를 받아주지만

너는 이미 이승의 꽃이 아니다

 

 

 

 

*시작 노트

 

릴케는 장미꽃에

가시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순수모순'이라 하였다

본인에게 있어 시를 쓴다는 것은

어린 아이가 고끝에 가시를 붙이고 노는 것처럼

예술이란 향기(香氣)에 가시를 박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천진힌 아이와 장미는 순수 그 자체이다

그러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가시는 모순덩어리다

이제 그 릴케의 '순수모순'을

도모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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