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영도다리 - 김수우

마루안 2018. 6. 4. 21:48



영도다리 - 김수우



구덕운동장 스쳐 보수동 헌책방통 지나
온몸 잡아채던 자갈치의 비린 손목에 잡혀
영도까지 걸어다니던 하학길
뱃길 넘보며 종아리 굵은 계집애
단발머리로 바다를 빗으며 갯내에 홈빡 젖어서야
집이 가까왔구나, 했다
다리를 건너면서, 길이 멀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을 걸었던 것
살무사 허물 벗듯
산동네 골목을 벗어두고 영도를 떠난 후
태종대로 가는 길목일 뿐이던
유행가 가사일 뿐이던 영도다리
돌비알에 엎어질 때마다 얼비치더니
삼십 년만에 다시 건너는 순간 선명히 솟는다
거룩, 꺼룩 갈매기 울음 삼십 년
내 몸은 수많은 영도다리로 이어져 있었던 것
사하라에 살 때도 돈키호테 마을에 십 년씩 머물 때도
시를 쓸 때나 사진을 찍을 때나
늘 영도다리를 건너는 중이던 것
모든 길 끝에는 비린내 어룽한 영도다리가 있고
영도다리를 건너야 내 집이 있었던 거다



*시집, 붉은 사하라, 애지








영도 - 김수우



아버지는 평생 원양어선을 탔다
어머닌 새벽마다 늙은 북어를 끼고 용왕을 섬기러 나갔다
큰아버지도 풍으로 눕기까지 그물을 끌었다
바다에 매달린 산동네
둘째 삼촌은 뱃머리의 녹을 벗기는 선박공장 노동자였다
셋째, 넷째 삼촌 작업복에서도 늘 비린내와 쇳내가 났다
비탈길 오르던 파도
큰고모는 산복도로 끝에 있는 파란대문이 높다고 불평했다
막내고모는 그물공장에 다니며 뾰족구두를 샀다
골목우물은 검고 깊었다
동생은 도르래로 물날개를 건지며 놀았고
일곱 살 나는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배웠다
모든 그림자를 낳고 사랑한,
헐렁한 바다만 껴입고 있던 할머닌
종종 후줄근한 파도를 탱탱하게 풀먹여 빨랫줄에 널었다
봉래동,
신선동,
청학동,
영선동
동네 이름 때문인지 너도나도 천천히 신선이 되어갔다
온몸땡이 굴딱지인 신선들은 오늘도 굴딱지발톱을 깎고
쌓인 발톱 위로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멀다



*시집, 젯밥과 화분, 도서출판 신생






# 부산엘 가면 꼭 영도다리를 걷는다. 영도대교라는 이름보다 영도다리로 부는 게 더 입에 착 붙는 곳이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남포동 블루스의 낭만은 퇴색했지만 영도다리를 건널 때면 공연히 마음이 설렌다. 시인의 추억 또한 빛바랜 사진처럼 오래 전 기억 속에서 더 애틋하지 않겠는가. 올 가을에도 부산에 가면 영도다리를 건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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