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아(孤兒)가 아닌 나 - 이철경

마루안 2018. 6. 11. 22:06

 

 

고아(孤兒)가 아닌 나 - 이철경


과부에게 비릿한 탄식이
고름처럼 흘러나오듯
고아의 눈빛엔 움푹 팬
허기가 서려 있다
아..., 그 굶주림의 세월
살려달라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며
에티오피아 아이처럼
무엇이든 입구녕에 넣어야만 한다
환난 중에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성경의 고아는 여전히 버려져 있다
들판에 흔들리는 꽃처럼
세상은 그대를 그저
홀로 피어나라 버려둘 뿐이다
단지 기댈 수 있는 것은
태초에 모든 동물의 세포에 기입된
연민신경에 기대어
깃털이 돋아 하늘을 날아오를 때까지

더는 그대들이 슬퍼하거나
눈물짓지 않기를,
고아가 과부의 마음을 모르듯
고아가 아닌 내가
홀로 꽃 터지며 외롭다 말하는 그대를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시집,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북인


 

 



고아 하성자 - 이철경


어디서 와서 이렇게 모였는지 알 길이 없으나
추운 겨울날 긴질에 걸린 그녀가 왔다네
낙타 등 같은 휘어진 어깨엔 오그라든 세간살이와
손에 들린 여물통 같은 그릇 겉더께에는
그녀의 지나온 내력이 담겨 있었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일행과 있지 않고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아 짐승처럼 밥을 먹었네

그녀의 심경에 발작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따뜻한 형제이고 누이 같은 존재였다네
길가의 이름 모를 들풀에 말을 걸고
강아지와 대화하던 그녀는
알 수 없는 신들의 영역까지 맞닿은 눈빛으로
우리를 달래기도 하고 손잡고 기도하기도 하였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성자 같지 않은 것,
발작이 시작되면
거품 물고 바위에 머리를 찧기도 하며
동공이 풀린 황소처럼 혼이 빠진 좀비로 돌변하기도 하였네
살구가 만발한 초여름 그녀 홀로 뒷산에서 길을 잃었네
연락이 끊긴 지 몇 날이 지나서야
강아지가 찾아낸 그녀의 주변엔 온갖 꽃들이 만발하였고
저만치 양은그릇 한 가득 뱀딸기 담겨 있었네

 

 

 

# 이철경 시인은 1966년 전북 순창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1년 계간 <발견> 신인상 당선과 계간 <포엠포엠> 평론상을 수상했다. 3회 목포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죽은 사회의 시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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