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벽장 유감 - 박순호

마루안 2018. 6. 11. 22:13

 


벽장 유감 - 박순호


주술을 행했던 흔적처럼 음산하다
어둠을 모시고 있던 자리는 왜 하나같이
검은 얼룩이 득실거리는 걸까
잊고 지냈던 물건들 옆구리마다 오래된 지문이 묻어나온다

내 몸 안에도 벽장 하나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어둡고 무거울 리 없다
반 쪼가리 생각들이 출렁거리는 밀실이다
꿈꾸는 죽음에 대한 느낌은 사라졌지만 이제
죽음을 꿈꾼다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
수첩에 기록된 문장 한 줄이 놓아주지 않는다

'고통의 뼈다귀들이 모여 몽상하는 습한 벽장'

문득 벽장 안에 아버지의 유품이 잘 계시는지 궁금하다


*시집, 헛된 슬픔, 삶창

 

 

 

 

 


틈 - 박순호


엿보다, 비집다, 노리다와 같은 동사 앞에
곱게 단장한 단어를 골라 넣지 못하던 시절
불길하고 음침한 골짜기를 품속에 넣고 다니던
날카로운 날들이 있었다

음흉하고, 얍삽하고, 기회주의라는 어휘들을 대입하며
우물쭈물하던 나에게 능멸을 일삼던 틈새
더러운 즙이 찔금찔금 새어 나왔다

나를 거들먹이며 수군거리던 심장을 향해
가슴 안쪽에 주먹 칼로 그어버리라고 계시하던
위험한 종교를 따라가기도 했었다

그러한 칼날이 무디어지고 녹이 슬기 시작한 건
유리구슬이 바닥을 스치고 간 둥근 한 면처럼
주사위가 바닥에 접했던 점들처럼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하지만
알 수 없는 틈 하나가 생겨나면서부터였다

엿보다, 비집다, 노리다 같은 동사 앞에
틈새라는 명사를 가만히 내려놓는다
구름과 나비가 통하는 문
삶이 넓어지고 평편해진다
환한 눈썹이 달린다




*시인의 말

어떤 날은 시를 쓴다는 것이 눈물이었고 상처였다
또 어떤 날은 쓰여진 시가 눈물과 상처를 치유했다

부디 오랫동안 내 삶과 반죽되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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