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찔레꽃 - 심종록

찔레꽃 - 심종록 누이를 다시 보았다 치솟는 전셋돈 감당할 수 없어 변방으로 쫓기듯 터를 옮긴 후였다 창신동 산 18번지 무너진 성곽 아래 최루탄 연기 안개처럼 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해 봄 지붕 낮은 하꼬방에서 미싱을 돌리다 백골단에 쫓겨 들어온 앳된 사내 원단 속에 숨겨주고 사랑까지 했던, 아티반 스무 알의 오기로 능멸하는 현실의 손목을 그었던 스물두 살 외롭던 마음이 잉걸처럼 타올랐던 아비 없는 자식을 낳고 핏기 없는 얼굴에 땀방울만 선명하던 썰물 빠져나간 개펄처럼 악착같이 버티다가 돈 때문에 인연까지 끊었던 누이가 봄날 아침 찔레덤불로 피어 있다 소금 알갱이 같은 꽃 매달았다 *시집, 쾌락의 분신자살자들, 북인 소견서 - 심종록 1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오랫동안 포구를 떠돌았네 2 달이..

한줄 詩 2018.06.14

세상이 어두워질 때 - 최준

세상이 어두워질 때 - 최준 개는 다른 개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다 개는 다른 개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개에게는 슬픈 추억 따위가 없다 개는 슬픈 추억 따위는 만들지 않기 때문에 개는 슬픈 추억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다 그래서 개는 늘 현실 속에서 산다 그래서 개의 울부짖음은 현실 속에서만 들려오고 곧 잊혀져 버린다 너무도 쉽게 개는 현실을 떠나보낸다 개는 세월이 저를 그리로 데려가 주리라고 믿는다 세월이 데리고 가는 거기가 어딜까를 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둠이 올 때 개는 그 어둠을 내부에까지 끌어들인다 개가 어두워질 때 이 세상은 어두워진다 어두운 세상 한 곳에 웅크려 개가 잠들면 우리는 그 개의 잠울 깨우지 말아야 한다 개가 선잠을 깰 때 세상은 더 어두워진다 잠 깬 개의 컹컹 소리는 이웃의 잠든..

한줄 詩 2018.06.14

손목시계, 무한궤도의 - 최세라

손목시계, 무한궤도의 - 최세라 물 위에 초침 치며 살얼음이 녹는다 어디서나 사과나무가 에워쌌다 투명한 팔이 붉은 과실을 중천에 던지고 다시 녹색이 돌아왔다 남자의 봄은 손목 둘레에서 매년 낡아간다 태엽 감아 시계에 밥을 주면 무한궤도의 가난이 굴레 채운 손으로 귤빛 고리 무수히 겹치며 하늘이 엮이고 할부로 산 날들 하루씩 저물어간다 서로의 밥그릇에 미안한 젓가락을 담근다 휘파람 불지 못하는 남자들이 빈방만큼 뚱뚱해진 여자를 안고 실날같은 그믐달을 파고들었다 아직 받지 못한 꽃이 있어 늙지 않는 여자들도 태엽을 감는다 오른발을 컴퍼스 삼아 동그라미 그려본다 핏줄을 관통한 실탄들이 꽃봉오리로 맺히는 정원 등에 얹힌 집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달팽이도 딱딱한 돌에 걸터앉아 허한 하루를 태엽 감는다 조용한 창들이..

한줄 詩 2018.06.14

외로움의 깊이 - 조찬용

외로움의 깊이 - 조찬용 산 밑 외딴집이 풍경처럼 멀다 흰 눈의 어지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침이 깊은 외따로운 노인 때문이었을까 외딴집으로 이어진 발걸음이 보이지 않는다 등대처럼 산을 지키던 저녁 등불이 눈을 뜨지 않고 동네 마실길로 이어진 길엔 눈바람이 쓸고 간 갈기만 길고 차다 늙은 아내 먼저 보내고 혼자 세상의 무게를 견디는 일도 쉽지 않았으리라 미망의 시간이 너덜너덜 집을 짓기도 했으리라 외롭고 쓸쓸한 건 말이 없다 사는 일도 흰 눈처럼 내리다 슬그머니 적멸을 꿈꾸는 일인데 오늘은 그가 가고 없다 몸부림치며 누군가를 그리워한 죄 무섭다 *시집, , 북랜드 느리거나 또는 쉬거나. 2 - 조찬용 허허로울 때 술값 잘 내는 봄날 같은 친구가 병원 영안실에서 나를 부른다 50대 후반까지 그럭저럭 잘 ..

한줄 詩 2018.06.14

나쁘게 말하다 - 기형도

나쁘게 말하다 - 기형도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 어떤 그림자는 캄캄한 벽에 붙어 있었다 눈치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 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 멈칫했다, 석유 냄새가 터졌다 가늘고 길쭉한 금속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잎들이 흘끔거리며 굴러갔다 손과 발이 빠르게 이동했다 담뱃불이 반짝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렸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여행자 - 기형도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한줄 詩 2018.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