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영토는 이동중 - 강신애

마루안 2018. 6. 11. 21:53

 

 

내 영토는 이동중 - 강신애


봄비 내리는 날 이사갈 집 둘러보았습니다
내 속에 일산화탄소 가득하여
몇날 며칠 헤매다 고른 방 하나,
거기 그토록 오래 꿈꿔온 숲이
마을을 양파처럼 감싸고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실제의 숲은 상상의 숲보다 어질고 장엄하여
젖은 음계로 걸어온 나를 겹겹이 안아주었습니다
숲을 바라보는 마음 절로 붕대 풀려
다복솔에 감긴 안개가
마른 육신을 다복다복 채우고
낯선 배우의 暗行, 입부리를 벌리고 바라보던 박새 한 마리
서둘러 상수리나무 뒤로 퇴장합니다

걷거나 잠들 때에도 귓바퀴를 지잉 울리는 숲의 이명을
마음 어둔 헛간에 못질해 놓고
어떤 드문 시간이 나를 데려다주기만을 바라왔던 나날들

이제 상상의 숲에 갇힌 나의 사랑 끝내야 할 때,
굽이치는 수맥의 광기를 밟고 선 숲의
저 그윽한 무표정을 배워야 합니다
비닐우산 속 흐린 시야 너머로
거미는 제가 만든 거미줄을 타고 푸른 만(灣)을 건넙니다


*시집,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창작과비평

 

 

 



절박한 것은 단풍뿐 - 강신애



아침마다 숲은
차도르를 뒤집어 쓴 여인처럼
빈틈없는 안개를 피워올렸다
가을이면 고색창연한 우울이 도져
귀족이 됐다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했다
완전한 몸에 깃든 미숙한 욕망,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날개
최초의, 夢遊의 가을
낙엽을 직조해
날벌레의 옷을 입는다
날 수 없는 것은 영혼이 없다!
방바닥에 수북이 등 대고 누운
무당벌레들을 뒤집어놓았지만
끝내 날아오르지 않았다

불법체류자 낙엽처럼
애인이 떠났다
불법체류자 낙엽처럼
아무것도 절박하지 않았고
절박한 것은 단풍뿐이었다

홍시의 즙
그대여, 가을이면 나는 실직한다
온종일 죽어가는 불씨인 듯
적막한 몸속에 홍시의 즙을 주사해다오
창틀이 벌레의 시체들로 뻑뻑하여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다
봉함된 글자가 튀어오른다
유리창에는, 오오
영원히 마르지 않을 눈물 같은 것이 엉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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