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모든 축제엔 비가 내린다 - 서규정

모든 축제엔 비가 내린다 - 서규정 고통이 오면 고스란히 당하며 살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된다 죽어서도 숨 가쁜 자 그 숨 잠시 멈춰라 뼈에 사무칠수록 새록새록 군침이 돌아 말이 풀로 솟아야 하는 것이니 발성은 발성으로 터지지도 않고 들키지도 않게 참고 또 참아 먹먹하고 먹먹한 것은 침묵이 아니라 완창이다 풀이 바람에 다소곳 흔들린다 꼭 다문 소리가 소리로 통하듯 통통 여문 빗방울을 두드리듯이 그냥 받아 넘기듯이 무덤들은 우산처럼 팽팽하게 타오른다 *시집, , 작가세계 나는 창고아저씨 - 서규정 붉은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 편에 서성이다가 신호등 바뀌면 눈치 볼 것 없이 바로 길 건너거나 사설학원 원장 뒤에서 초임교사의 눈빛이 젤 반짝거린다고 씹거나 이십 년 살고 이혼하는 부부 곁에 서서 깨진 유리창..

한줄 詩 2018.07.11

이별이란 - 김익진

이별이란 - 김익진 이별이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수백억 광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고 우주에서 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다 한 사랑이 화석화 되는 것이고 온 지구가 쓸쓸해지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로 떠나는 또 다른 여행이고 만류인력의 고독이다 무에서 또 다른 존재를 찾는 수행길이고 철학자의 길이다 나를 만져 봐도 외로운 것이고 음식을 먹다가도 웃고 우는 것이다 노래를 듣다 읊조리는 것이며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꼭 쥐고 자는 것이다 이별이란 미래를 닫아버리는 창문이다 깨지면 날카로운 날을 세우지만 그 상처가 그리운 것이다 *시집, 회전하는 직선, 조선문학사 세상 밖으로 - 김익진 그는 새벽에 집을 나섰다 며칠간 여기저기 떠돌다 바닷가에서 고향친구도 만났다 그들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며칠 ..

한줄 詩 2018.07.11

이 저녁은 - 김이하

이 저녁은 - 김이하 가을 이 저녁은 나도 무슨 색으로 물들고 싶다 저기 저 들의 사람들 이제는 표정 없이 허수아비 되어 가슴 툭 터진 방천, 말뚝이 되어 불콰한 햇살과 한잔하고 햇살 들다 지나간 지 한참인 마루에 바람에 들다날다 오갈 데 없는 낙엽처럼 쓰러진다, 가을 이 저녁은 더 이상 두드릴 콩동도 없이 더 이상 까발릴 흥부네 박덩이 같은 것도 없이 너무도 심심하고, 무료하고, 삶은 추워서 뜨거운 눈물로도 얼굴 데워 보지만 꽃 피고, 잎 푸르다 먼 산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물들어 버리는 나무 한 그루의 빛도 닮지 못하고 저 들의 빛까지도 잃어버리고 그만 어둠에 휩싸이고 마는데 가을 이 저녁은 나도 그만 어둠에 묻혀 늦은 군불에 도깨비처럼 타는 불빛 그 따숩고 아련한 빛이면 좋겠다 *시집, , 바보새 ..

한줄 詩 2018.07.10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루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말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집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51년 하필이면 어린 나의 생일날 일기장에 침발린 연필 글씨로 씌어 있었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시집, , 시와시학사 봉선화 - 서정춘 -1950년대 너는 가난뱅이 울아비의 작은 딸 나의 배고퍘던 누님이 아이보개 떠나면서 보고 보고 울던 꽃 석양처럼 남아서 울던 꽃 울던 꽃 # 서정춘 시인은 1941 전남 순천 출생으로 1968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 , 등이 있다.

한줄 詩 2018.07.09

분리수거 - 김재진

분리수거 - 김재진 철 바뀐 옷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동전처럼 잊혀져도 모르는 사람 있다.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더러는 머리 복잡하게 쓸데없는 것까지 뭘 기억해, 하며 기억 바깥으로 쫓겨난 채 잊혀져 가는 사람 있다. 일종의 쓰레기다. 기억으로부터 분리된 채 재활용되지 않는. 자신이 분리수거 된 줄도 모르고 (사실은 알면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림에 기대어 있는 生의 의지다. 가장 필요하신 게 뭐냐고 묻자 난방비라고 대답하는 겨울, 양로원에 가 봤다. 봄날, 옷 갈아입을 때쯤이나 손끝에 닿을 동전 여려 개 그곳에 있고, 짤랑거리는 소리도 없이 쪼그리고 앉아 온다더니 오지 않는 자식 기다리는 눈곱 낀 하루가 그곳에 있다. 치마꼬리 잡고 따라나섰던 시장길 졸다가 놓쳐버린..

한줄 詩 2018.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