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늙어간다는 것 - 박경희

늙어간다는 것 - 박경희 앞니가 빠지고 등이 굽은 외정 마을에 사는 최 씨 할아버지 손등은 감나무 껍질 벗겨진 듯 꺼칠하다 고집은 쇠스랑에 걸어두어도 좋을 듯한데 쉰내 나는 오토바이 한 대 동무 삼아 산 지가 손꼽아도 손가락이 모자라다 어디 탈탈거리며 늙어가는 일이 쉬운가 앞집 권 노인 농약 하다 쓰러져 콩밭으로 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자 끌끌거리던 경운기마저 주저앉았다 자전거로 달리던 삽자루에 핀 녹 푸른 나팔꽃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무르팍 해진 자리에 헝겊을 덧대 서로를 덮어주는 일 환삼덩굴이 제 손바닥 안에 별을 들여앉히는 일 권 노인 보내고 쭈그려 앉아 대문 밖만 바라보다가 수숫대 모가지에 달라붙는 새 떼만 쫓는 하루 번호판 한쪽 찌그러진 삶처럼 그래도 탈탈거리며 가는 논둑길 쭈글쭈글 달라붙는 대추..

한줄 詩 2018.07.09

나쁜 기억에 대한 대처법 - 이철경

나쁜 기억에 대한 대처법 - 이철경 귓속에서 윙윙거리던 벌레 한 마리 뇌 속까지 들어갔는지 종일 어지럽고 열이 나는데 그놈을 끄집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네 성냥개비로 후비면 헛소리만 나오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전을 바꿔야 했어! 잠시 후퇴를 선언하고 게릴라 작전을 썼지 살며시, 아주 살며시 면봉을 구멍에 갖다 대고 냅다 후볐지 우라질! 벌레가 요동을 치는데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피가 나오고 벌레는 더 깊숙이 들어가 골 속을 헤집고 다니네 더 깊이 들어간 벌레를 잡으려면 굴 속에 들어가야 하기에 박살을 내야겠기에 작두를 준비했지 그놈을 잡으러 만반의 준비를 하고 힘껏 썰어 내는데 아뿔싸! 벌레는 연기처럼 공중으로 오르더니 골통이 부서져 버렸네 그냥, 두고두고 벌레 엉덩이 찌르면서 공생할 걸 ..

한줄 詩 2018.07.09

길 위의 풍장 - 김광수

길 위의 풍장 - 김광수 햇물 곁으로 길은 끊어졌다 장마 뒤끝 사금파리 같은 뙤약볕이 모종되고 있는 길섶 엉거시 솔개그늘, 말캉말캉 굵은 혈관 같은 지렁이 한 마리 산 개미떼들에게 육보시 꽃을 피운다 늘어진 청솔나무 우듬지 청설모 한 마리가 눈을 비빈다 몇 날 며칠 폭우 속, 저 붉은 알몸뚱어리 용 한 마리가 질흙밭을 용암처럼 흐르며 햅쌀처럼 씻긴 새 흙을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고 *시집,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문학과경계사 길을 건너면 - 김광수 신촌로터리, 횡단보도 빨간 신호등 건너편 겨울비 쌉싸래하게 흩뿌리는데 검고 낡은 외투깃을 세우고 서 있는 저 중늙은이 노고단 아랫동네 신작로 구판장에서 막걸리 봉초 새우깡 비사표 성냥 팔다 홀아비로 죽은 절름발이 동수 아재 닯았네 신호등 바뀌어 나는 저쪽으로 ..

한줄 詩 2018.07.09

망초꽃 필 때 - 강영환

망초꽃 필 때 - 강영환 산기슭에 애인을 지운 날 할미꽃은 가슴에 오후를 심었다 따라 가겠다고 잡는 소매 뿌리치며 통곡이더니 숱한 오후가 지나간 뒤에도 곁에서 피는 망초꽃을 보면 못다 핀 사랑 참 많이도 남았구나 생각했다 잡초 우거진 띠집 옆 빈자리에 해마다 피는 할미꽃을 보면 남아 있는 애증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곁에 와 울던 바람도 구부정해져 잠이 들었다 낮은 지붕에 풀꽃이 지고 곰삭은 맘 씀씀이가 잊힐 무렵 할미꽃이 졌다 앞산 이마에 홀로 저문 달을 걸었던 그 숱한 오후가 붕분 가라앉듯 몰래 가버렸다 망초꽃 하늘하늘 여린 몸짓으로 늦바람을 잡던 어린 청춘도 골짜기에 묻혔다 오후는 다시 오지 않고 할미꽃 필 때마다 옆구리에서 이명 같은 옷자락 끄는 소리가 났다 *시집, 물금나루, 도서출판 전망 다..

한줄 詩 2018.07.09

괄호 안을 더듬거리다 - 김점용

괄호 안을 더듬거리다 - 김점용 비가 온다 빗소리의 음각 속 나 어린 형수의 볼멘소리 들린다 어무이요, 데련님 더는 못 데리고 있겠십니더 통 말이 없고 문틈으로 보면 무슨 짓인지.... 부엌 뒷문에 교복이 숨어 있다 비가 온다 빗소리의 음각 속 아버지 외출한다 특별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늦은 빗길 우산을 들고 교문 앞 불빛에 서성이는 배다른 형의 아내 형수의 흐린 눈빛 감당할 수 없다 울타리 개구멍으로 빠져 비 맞는 까까머리 엄마 나 집에서 다니고 싶어.... 들리지 않는다 빗소리 거세지고 후두둑, 여름 방학이 지나간다 창문 틈으로 책가방 하나 보따리를 들고 씨 다른 누나네로 교복이 이사를 간다 비가 온다 이따금 천둥이 칠 때 아버지 웃으신다, 널 죽이고 싶어.... 핏발 선 망막 가득 비가 더 오고 만..

한줄 詩 2018.07.09

청춘을 거슬러 가는 우리는 - 박순호

청춘을 거슬러 가는 우리는 - 박순호 그때는 정말이지 차고 넘치도록 푸른 물방울이 생성되었지 상징을 사랑했었지 우리는 빙그르르..... 돌아가는 지구본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멈춘 자리에 여행을 계획했었지 자신만 알 수 있는 암호를 수첩에 기록하면서 이제, 탱글탱글했던 중심은 쓴물로 채워지고 치욕을 견뎌낸 자리는 쪼그라들었다 푸른 점의 테두리가 닳아간다 그렇게 말수가 부쩍 줄어들고 은유에 몰입할 나이가 된 선배들은 청춘의 폭죽에 관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밤늦도록 술잔을 채우고 주정하는 거밖에는 우리는 눈이 퍼붓는 창밖에서 청춘을 핑계로 떠나보냈던 여자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후회하며 썼던 일기를 펼쳐보며 다시 후회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러운 생각을 밀어내어 웃어보기도 하고 울음으로 바꾸어 어깨를 들썩거려보..

한줄 詩 2018.07.09

그늘의 노년(老年) - 박승민

그늘의 노년(老年) - 박승민 그늘은 평생 동안 자신을 벗어난 적이 없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이 되겠다는 버거운 마음도 애초에 없었다. 누군가 그늘의 넓이를 탓하며 허벅지를 발로 차기도 했지만 누군가 그늘의 깊이를 탓하며 말뚝을 박기도 했지만 그는 삶이 원래 그러하다고만 생각했다. 세상이 던진 수십 쌈의 바늘 같은 말을 듣고 집에 와서 누운 날 우우우 우우우 그늘이 자기의 몸을 필사적으로 비틀며 한 두어 시간, 크게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침이면 그는 또 잘 마른 햇빛 한 장을 누군가에게 내민 채 마당 끝에서 골똘히 혼자 깊어만 가고 있었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본의 아니게 씨 - 박승민 -한식날 닭이 목이 말라 죽어 나자빠져도 물 한 모금 까..

한줄 詩 2018.07.09

풍선의 기적 - 여태천

풍선의 기적 - 여태천 나는 조금씩 멀어지는 시간에 대해 쓰고 있었지. 갑자기 흰 얼굴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질문 같은 거 안 하면 차라리 그것은 지나친 시련 분명한 인식은 질문들의 끝을 통과하고 그러고 나서야 만들어진다는 것을 어젯밤 근엄하던 그 고양이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생각했지. 어쩐지 중년의 우리라고 써야 될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름이 뭐더라.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분별이므로 그 생각에 의지하면서부터 기억과 함께 두 손을 잃고 말았지. 고양이가 남기고 간 뻗친 수염은 먼 것과 가까운 것 사이를 오고 가던 저 열렬한 기침은 슬프게도 발아래에 있는데 우리의 고민은 좀체 내려올 줄을 모르네. 자꾸만 뭔가가 분명한 우리를 채우고 또 채우고 채우리라는 걸 우리가 텅 빈 풍선이었..

한줄 詩 2018.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