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별빛 목욕탕 - 김병심

마루안 2018. 7. 16. 19:47



별빛 목욕탕 - 김병심



아버지는 뒤란의 우물을 메우지 않고 목욕탕 하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 인생이 굽을 볼 때
바닥에 닿으려는 나를 살며시 씻겨 주는 한밤의 목욕


산방산 그늘마저 사라진 한밤
마농꽃 냄새 삼동 냄새 보리 익는 냄새를 따라
어둠 속에서 초원을 휘젓던 말 탄 소년이 달려옵니다
오름 위에서 바라보던 바다가 우물 속처럼 찰랑이면
볼이 터질 듯 부풀어 왔던 소년
마음 가득 모험과 호기심으로 흥미진진하여
마음 밖 소란은 마음 밖의 무관함으로 순한 눈빛을 지니던 소년
타향살이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꿈을 펼치기도 전에 소란에 휩쓸려 찢어 버린
꿈의 조각들이 하늘 가득 떠 있습니다


한낮이 부끄러워 그늘로만 걷던 내가 맨몸으로 세상에 빛을 쬐는 시간
조금씩 조금씩 밝음의 빛으로 다가가기 위한 시간
소진한 제 빛이 안간힘을 쓰며
우물 속에 앉아 볕을 쬐는 밤
우물 안 개구리가 금박무늬로 폴짝 떠올랐습니다
섬 하나가 온통 별빛으로 빛납니다


아버지는 나의 일기장을 버리지 않으시고
큰 몸통에 걸맞은 커다란 마음 담아 주시려고
고향집 뒤란에 목욕탕 하나 남기고 가셨습니다



*시집, 사랑은 피고 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도서출판 각








사랑이라는 낙서 - 김병심



당신의 등에 매달린 인생으로 사는 데서 비롯되었다


내 몸을 빌려 말을 거는 하루쯤은
오고 싶은데 오지 못하는 당신을 이해하기도 했다


머뭇거리며 밀치는 내게
살아만 있어 달라는 당신을 곁에 두고
달아나는 꿈을 꾸는 눈꺼풀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살아있는 듯 살고 있는 말라 버린 귀


혼잣말로 불러내서라도 붙들고 싶던
당신이 솜을 물고 있다


앓던 자리에 다시 생겨날 말들이
햇솜을 물고 있다


장마를 끌고 오는 유월엔 햇빛이 들기도 하던 하루쯤은





#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다. 김병심의 시는 술술 읽히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작금의 시판이 지 잘난 맛에 시를 쓰는 통에 온통 난해하고 뜬구름 잡는 문장들이다. 대체 뭔 소린지를 모르는 시 앞에서 난감할 때가 많다. 독자와 소통하는 이런 시가 많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