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든다섯 살의 홍역 - 박두규

마루안 2018. 7. 16. 20:01



여든다섯 살의 홍역 - 박두규



어머니는 온몸의 수분이 증발한 건어물이 되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비라도 와야 겨우 '비가 오네.'라고 한마디 했다


몸속 가득했던 서러움과 분노의 세월도 다 말라버린 것일까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젖을 물리던
사랑과 욕정의 시간은 정녕 있었던 것인가


어머니는 여든다섯 살의 홍역을 앓았다
초승달에 퍼런 서슬이 돋고
말라버린 눈물샘이 가득 차오르기를 바라며
연골이 닳고 통증만 남은 관절로 가출을 시도했다


어머니가 그토록 갈망하는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경전들에 나오는 죽음일까
팔십다섯 살의 홍역을 치른다


매일 똑같은 해가 202동에서 뜨고
한결같이 201동 애기사과나무 아래로 지는 일상이
언제부턴가 서러움을 키웠을 것이다


미라처럼 무미건조한 몸뚱어리보다는
질정할 수 없는 눈물샘의 슬픔이
차라리 칠정의 더러운 숨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집, <두텁나무 숲, 그대>, 문학들








늙은이가 버리고 간 꽃을 줍다 - 박두규



깊은 숲 아무도 가지 않는 그곳에 꽃 한 송이 피었다.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다가 갔지만, 그 꽃은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았고 꽃을 피워 봄이 되었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었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했다. 평생을 한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건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나는 늙은이가 버리고 간 그 꽃을 주어 들고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