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늙은 남자의 얼굴을 닦다 - 김선향
깊은 밤 좁은 집안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새 선반의 놋그릇 앞에 서 있게 되지
머지않아 아버지의 유품이 될 저것
유기(鍮器)를 만들었던 아버지
가볍고도 반짝거리는 스뎅그릇에
단박에 무너지셨지
노름빚에 떠밀려 알코올에 치여 맥을 못 추시더니
마침내 벼랑 끝에 홀로 쓰러져 있는 한 남자
놋그릇 안쪽을 문지르고 문지른다
아버지에게 품었던 오래된 독(毒)이 걷히고
은은한 윤이 감돌기 시작하면
터널을 밝힐 등불이 켜질 것만 같아서
이 밤 늙은 남자의 얼굴을 닦는다
*시집,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감나무 - 김선향
학교에서 돌아와
노란 맨드라미처럼 무료할 땐
감나무를 오르는 일밖에
반질거리는 이파리 사이로 고갯배가 뜨고
아버지가 커다란 손을 흔드시더라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아버지를
나지막이 부르면
한나절이나 놀아 주시더라
어둠이 감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에 가득 차도록
할머니와 일 나간 어머니는 돌아오실 줄 모르고
텅텅 빈집엔
고요만이 새파랗게 살아 있던 날들
두 차례 더 감꽃이 피고 지더니
할머닌 감나무 꼭대기 홍시 따라
하늘로 오르시더라
어머니 슬하에 홀로 남아
늙어가는 감나무 쳐다보면
마당의 돌덩이가 명치께를 누르더라
# 김선향 시인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충남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여자의 정면>이 있다. 현재 <사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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