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설교자 - 최규환
오래된 어촌 상회에서 컵라면을 말아먹던 사람
엽서에 적힌 안부가 궁금해
뜨거움을 불면서 해가 지고 있다고만 말하고
세상 누구보다 고독한 등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였으나
그가 적어놓은 운율은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밀이었다
집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정말이지 가까운 약속이 오고야 말았고
빼곡한 노트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부서질 듯 무너질 듯
삶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는 죽음일 거라 여기면서
세상은 빛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그늘에 담긴 내용을 읽고 가는 울음일 거라 말하면서
바람 부는 방향에서 회오리가 쳤는데
오늘처럼 먼 산 보는 일이 잦았던 어느 봄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였으나
집으로 가는 길은 마음만으론 갈 수 있는 건 아니고
견디는 식물의 맘 어디쯤은 있을 거라고 말이지
다시는 무덤이라 말하지 말고
영영 잊힌 사람이라 말하지 말고
여기는 다만 슬픔만 내려앉는 살 만한 동네일 뿐이라고
난곡동 산동네에 올라 풀빵 같은 노래로 겨울을 토닥였던 사람
돌아서 눈물 비추지 않아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꽃이 피었다가도 울먹이는 날이 많았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친구 - 최규환
습지에 둘러앉은 생이 짙은 빛 그림자로 떠돌았다
어스름이 멱을 감는 시장통 이른 저녁
친구는 오늘 같은 날엔 슬픔을 마셔도 괜찮다고 했다
낡은 조명을 쏟아내던 싸롱의 밤
혹은 포구로 향하는 걸음을 대신하던 갈매기들이
먼 곳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풍경이 몸에 깃든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가
얼비친 창가에 서면
깊고 순한 바람이 폐역(廢驛) 가까운 그늘로 데려다 놓곤 하였다
떠난 친구가 착한 건
내 방식의 그늘에 숨겨둔
망각의 어느 지점에 남아 있어서다
소식이 없었으나
마음에 두르고 있던 편지를 꺼내보는 날
나는 문을 걸어 잠근 두문불출에 있었고
친구는 장승처럼 겨울 윗목에 있었다
마음을 놓아주지 못하는 병이 깊은 탓이었다
한 키의 생을 더해
어쩌지 못하는 그늘에도 빛이 고여 있다
# 최규환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1993년 <시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타는 광대의 사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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