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옛집에 눕다 - 김영춘

마루안 2019. 11. 19. 19:55



옛집에 눕다 - 김영춘



잡담의 세월을 만나

사람 떠난 빈방에 불을 지피고

옛집에 눕다

나가 살아야 되는 줄로만 알았던

스무 살 이후의 청춘을 데리고 돌아와

사십으로 눕다

빈집의 빈방 시린 구들장에

한 사내를 마음껏 눕힌 한 시대여

흐린 시야를 삼키며

또 어느 불빛 환한 거리에

발을 붙여야 하나

우리 무지몽매하게 순결하였을 때처럼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오늘을 숨죽이며

도란거리던 이야기 소리 끊어진

빈방에 불을 지핀다



*시집, 나비의 사상, 작은숲








흑백사진 - 김영춘



묵은 서랍장이나 책갈피를 열고

우리들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걸어나오는

흑백사진은 늘 외롭다

출장 나온 사진사는 마당에 허리를 굽히고 서서

해보다 밝은 빛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사진 한 장을 세상에 떨어뜨렸을 터이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나가야 할 것이므로

서랍이나 책갈피에 끼이고 만 흑백사진의 여백은

끝내 다다르지 못할 것 같은 푸른 하늘인 셈이다

삶의 무게가 힘겨워질 나이에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지 않고

한 세대를 넘어 우리 앞에 펼쳐질 뿐이다

흑백사진의 얼굴은 어린아이들도 삼엄하다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할

먼지보다 가벼운 세상의 언저리가

사뭇 두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