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에 눕다 - 김영춘
잡담의 세월을 만나
사람 떠난 빈방에 불을 지피고
옛집에 눕다
나가 살아야 되는 줄로만 알았던
스무 살 이후의 청춘을 데리고 돌아와
사십으로 눕다
빈집의 빈방 시린 구들장에
한 사내를 마음껏 눕힌 한 시대여
흐린 시야를 삼키며
또 어느 불빛 환한 거리에
발을 붙여야 하나
우리 무지몽매하게 순결하였을 때처럼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오늘을 숨죽이며
도란거리던 이야기 소리 끊어진
빈방에 불을 지핀다
*시집, 나비의 사상, 작은숲
흑백사진 - 김영춘
묵은 서랍장이나 책갈피를 열고
우리들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걸어나오는
흑백사진은 늘 외롭다
출장 나온 사진사는 마당에 허리를 굽히고 서서
해보다 밝은 빛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사진 한 장을 세상에 떨어뜨렸을 터이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나가야 할 것이므로
서랍이나 책갈피에 끼이고 만 흑백사진의 여백은
끝내 다다르지 못할 것 같은 푸른 하늘인 셈이다
삶의 무게가 힘겨워질 나이에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지 않고
한 세대를 넘어 우리 앞에 펼쳐질 뿐이다
흑백사진의 얼굴은 어린아이들도 삼엄하다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할
먼지보다 가벼운 세상의 언저리가
사뭇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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