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마법의 시간 - 최영미

마법의 시간 - 최영미 사랑의 말은 유치할수록 좋다 유치할수록 진실에 가깝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뜨거워찌 행복해찌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너밖에 없찌, 그 말을 못해 너를 보내고 바디버터를 덕지덕지 바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마법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파 망고와 파파야 즙을 머리에 바르고 올리브오일로 마사지하고 싱그러운 페퍼민트와 장미꽃 향으로 중년의 냄새를 덮고 어미의 병실에서 묻은 기저귀 냄새도 지우고 기다려찌 너밖에 없찌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아미출판사 낙원 - 최영미 "인생은 낙원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낙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지요" 카라마조프 형제의 말을 베낀 그날은 흐린 날이었나, 맑았다 흐려진 하루의 끝, 까닭 모를 슬픔이 쏟아지던..

한줄 詩 2019.11.03

슬픔의 유통 마진 - 이성배

슬픔의 유통 마진 - 이성배 밭떼기로 넘긴 싱싱한 슬픔에도 유통 마진이 붙는다. 더 이상 생산자가 주장할 권리가 남아 있지 않은 구조인데 세계적으로 보자면, 남미 대륙 콜롬비아의 내전과 베트남 민중의 가난과 아프리카 대륙 에티오피아의 기아는 슬픔을 지배하는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점액질 가득한 생두의 껍질을 벗기고 말려 알맞은 온도에서 볶는 과정이 모두 원산지의 희망을 탈피하는 과정이다. 가혹하지만, 소비자들이 음용 가능한 단계까지 마진 없는 노동의 몫이다. 가공을 거친 슬픔은 햇빛이 부족한 소비자들에게 유용한 상품이므로 가끔, 낭만적으로 생산지 이름이 고급스러운 기호가 되기도 한다. 배추를 갈아엎고 참외나 감을 트렉터로 뭉개는 것은 노골적으로 밭떼기를 강권하는 자본의 힘을 보여주는 역설일 뿐, 생산 단..

한줄 詩 2019.11.02

단풍 묘지 - 류정환

단풍 묘지 - 류정환 불치병처럼 가을은 속절없이 깊어져서 되돌리긴 틀렸다고,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 그곳에 한 무리 낙엽들이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단풍 정류장, 흔들리며 한 생애를 견딘 얼굴들은 피를 나눈 형제같이 붉은 빛이었다. 바람이 끄는 마차가 도착하자 몇몇 낙엽들이 마차를 타고 떠났다. 차례를 다투거나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듯, 먼저 갈 테니 나중 오라거나 곧 뒤따라 갈 테니 어서 가라거나 하는 말들은 오가는 눈짓에 이미 담겨 있었다. 구름 속으로 마차는 사라지고 시나브로 붉게 물드는 하늘가, 볕이 잘 드는 언덕에 다사로운 마을이 있어 무덤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체온을 나누는지 미처 나누지 못한..

한줄 詩 201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