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런 식으로 서성이는 게 아니었다 - 서광일

마루안 2019. 11. 18. 19:30



이런 식으로 서성이는 게 아니었다 - 서광일



11월 저녁 버스 정류장 앞이었다
겨울이 도착하는 소리를 다급하게 들었다


사람들은 버스가 멈추는 지점을 향해 달렸고
몇 개의 얼굴들이 확대되었다가 사라졌다


부모와 자식은 간단명료하게 이별 연습을 하고
남편과 아내는 무관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라지지 않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다
어머니는 수술한 사실을 감추려고 전화기를 꺼 놓았다


아버지는 원래 아픈데다 원체 말이 없다
이 계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돈이다


다가올 인생이 끊임없이 12월만 반복될 것 같아서
두툼하고 견고한 외투를 입은 자들만 훔쳐보았다


사람들은 어깨에 맨 근심을 붙잡고 버스에 올랐다
어떤 추측도 인과관계도 분명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날 조심스레 지워 버린 게 분명했다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출판그룹 파란








바로 그때 - 서광일



얼마나 외쳤을까
탑승하지 못한 취객들이
버려진 전단지처럼 몰려다녔다
창을 내리고 올리며 행선지를 고르는 택시
신호가 바뀌기 전에 정지선을 급하게 떠난다
씨발과 좆같네 사이로 침을 뱉는다
이 밤의 신호 체계는 약속이 아니다
그때
한 사내가 가방을 던지며 도로로 뛰어들었다
삿대질처럼 경적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들리던 손이
도로 중앙으로 빨려 드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치솟는 RPM이 지긋지긋했던 걸까
멈추지 못한 택시 한 대가 사내를 들어 올린다
그는 급발진된 것이다
메슥거리는 목구멍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은 듯
부장은 어제처럼 비아냥거릴 게 분명하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내는 방문을 닫을 거다
닳은 구두 밑창과 함께
사내는 짓이겨진 꽁초처럼 꺾여 있다
비린내 같은 게 코끝을 스친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바로 그때






# 참 많은 상징과 은유가 담겨 있어도 술술 읽히는 시다. 읽어도 읽어도 단물이 쉽게 빠지지 않아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다. 내 인생이 별거 아니라고 느껴질 때 위로가 된다. 누가 그랬던가. 어둠은 나의 기쁨이라고,, 이런 시를 읽을 때면 더욱 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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