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행이다 - 함순례

마루안 2019. 11. 17. 18:52



다행이다 - 함순례



날 잡아 칼을 갈았다
무뎌진 날들이 숯물에 배어 흘러내렸다
주기적으로 갈아야 한다지만
선득한 날이 싫어
좀체로 칼 갈지 않고 살았다
그냥 살아야지, 하고
작정하자마자 금세 예리해진 칼날
그 기운에 움찔했던가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다행이다
내가 먼저 베었다



*시집, 울컥, 도서출판 역락








노안 - 함순례



마흔 갓 넘은 나이였다
내 몸에 장착한 최초의 무기
돋보기로 읽는 세상은
맑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까운 것 먼 것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가장 먼저 늙는 장기가 눈이란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몸을 온전히 보전하기 힘든 이유다. 시인은 <내 몸에 장착한 최초의 무기>라 했지만 중년 이후 하나 하나 고장나기 시작하는 몸에서 그거 하나뿐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훗날은 어쩔지 모르겠으나 지팡이도 보청기도 필요치 않으니 말이다. 노안 하나뿐인 나도 아직은 다행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식으로 서성이는 게 아니었다 - 서광일  (0) 2019.11.18
더 깊은 긍정 - 전윤호  (0) 2019.11.17
예순이 왔다 - 장문석  (0) 2019.11.17
염낭거미 - 김왕노  (0) 2019.11.16
금니 속에 비친 풍경 - 주영중  (0) 2019.11.16